2·28 등 역사의 거리이자 예술의 자취 남겨
중앙로는 일제강점기 때 닦은 신작로이다. 북성로·화전동·사일동·남일동·동성로 3가·덕산동을 관통해서 반월당까지 이어지는 12간(약 22m) 넓이의 도로이다. 당시 중앙로는 북성로·서문로·포정동과 함께 최대의 상가지역이었으며, 일본 사람들이 운영하던 금융기관·영화관·양복점·잡화점·주점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었다.
해방 이후 양복점·양장점·금은방·빵집·영화관·서점들이 들어섰다. 또한 학생들이 악대를 앞세우고 시가행진을 하던 거리였고, 10·1사건과 2·28의거의 거리였으며, 5·16 이후 지역의 조직 폭력배들이 속죄의 행진을 했던 거리이기도 하다. 1970년대 들어 남북 관통도로가 뚫려서 동·서신로와 함께 십자로 역할을 하고 있다.
중앙로에는 널리 알려진 명소가 많이 있다. 대우빌딩의 남쪽에 미국공보원과 경복여관이 있었다. 미국공보원의 원장은 맥타가트(Mctaggart)였고, 지역의 문화·예술공간으로 기여한 바가 컸으며, 대구 최초의 예술단체인 '예육회'의 음악 감상회와 화가 이중섭의 개인전이 열리기도 했다. 1960년대 중반 삼덕동 경북대병원 맞은편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문을 닫았다. 그리고 경복여관은 화가 이중섭과 소설가 최태응이 머물던 일본식 고급여관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향촌동의 옛 상업은행 대구지점 자리에는 선남상업은행이 있었다. 오쿠라(小倉武之助)가 중심이 되어 설립한 대구 최초의 일본인 은행이었다. 오쿠라는 우리 문화재에 대한 광적인 집착으로 수천 점을 일본으로 빼돌린 사람인데, 남선전기회사와 대구증권회사의 사장, 대구상공회의소 회장, 경북도 평의원을 지낸 부자였다. 또한 포정동과 화전동에는 대구금융조합, 가다쿠라 생명보험, 미쓰이 물산 대구지점 같은 식민지 기업이 있었다.
중앙로 네거리, 포정동에 한국은행 대구지점이 있었다. 지금은 하나은행 건물이 들어섰지만, 일제강점기 때에는 조선은행 대구지점으로 사용하였다. 1920년 일제가 건립한 르네상스풍의 벽돌조 2층 건물이었는데, 1927년 장진홍 의사의 폭탄 투척이 있었던 역사적 건물이기도 하다. 당시 경찰은 단서조차 찾을 수 없어서 이육사를 비롯한 여러 사람을 배후자로 검거하여 갖은 고문으로 허위 자백을 받아 재판에 넘겼으며, 그 뒤 장진홍 의사는 일본에서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1930년 자결하고 말았다.
화전동·포정동·향촌동 일대는 번화가였다. 서점·다방·영화관·금은방'레코드사·음악 감상실·제과점이 숱하게 많았다. 그 가운데는 서점의 명가 본영당서점을 비롯해 약속 장소로 유명했던 제일서적, 그리고 학원서점'대구서적'청운서점 같은 크고 작은 서점들이 있었다. 또한 대구극장·자유극장·송죽극장·키네마(한일극장), 아세아극장, 그와 함께 녹향을 비롯한 르네상스·하이마트·빅토리아·시보네 같은 고전음악 감상실, 그리고 피란 시절 문인들이 즐겨 찾던 백록·향수·살으리·무랑루즈'왕비 같은 다방이 있었다. 그 밖에 '굳세어라 금순아'를 녹음했던 오리엔트 레코드사가 있었는가 하면, 3대를 이어온 금은방의 명가 미성당이 있었다.
김종욱(문화사랑방 허허재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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