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입력 2009-07-29 07:00:00

박민규 지음/예담 펴냄

'선빵'이란 게 있다. 세상을 살다 보면 먼저 때리는 '선빵'의 중요성을 안다. 아이들끼리 싸움에서 '선빵'은 승부에 거의 절대적이다. 선빵 맞은 아이는 싸울 의지를 잃거나, 잠시 숨을 못 쉬거나 몸의 균형을 잃은 상태에서 상대의 후속 공격을 받아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기 십상이다. '선빵'의 충격을 이겨내고 상대를 꺾으려면 상대보다 몇 배 뛰어난 싸움 실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사람이 담이 커 봐야 얼마나 클 것이며, 싸움 실력이 있어봐야 얼마나 있을까. 체력이 강해봐야 얼마나 강할까. 그러니 '선빵'이야말로 절대적이다. '선빵'은 꼭 아이들의 싸움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날 때부터 메주를 밟아놓은 것처럼 생긴 얼굴의 여자, 지지리도 가난한 부모를 만나 공부할 기회를 얻지 못한 사람, 머리가 나빠 아무리 노력해도 공부가 안 되는 사람, 아무리 애를 써도 돈벌이와는 무관한 사람, 키가 무지하게 작은 사람, 팔 다리 한쪽이 짧거나 길어서 기우뚱한 사람…. 이들은 모두 세상으로부터 '선빵' 맞은 사람들이다.

일단 선빵을 맞았다면 발버둥 쳐봐야 그렇고 그런 인생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게으름을 부린 것도, 특별히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니다. 남들처럼 아무런 의식 없이 엄마의 자궁에서 열 달을 지냈고, 어떤 악의나 선의도 없이, 어떤 의도도 지니지 않은 채 세상에 태어났다. 그런데 세상에 나오고 보니 내 얼굴은 이미 '선빵' 맞은 피투성이였다. 어쩌란 말인가? 이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날 때부터 얼굴에 선빵을 맞아 '메주같이 생긴 여자'의 삶, 그 선빵 맞은 여자를 사랑한 '얼빠진 남자'의 이야기다.

어느 세대, 어느 장소에서나 '선빵'을 날리는 인간이 있다. 선빵을 날리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다. 마찬가지로 언제나 '선빵'을 맞는 인간이 있다. 이 역시 정해져 있다. 두 사람 간의 싸움은 결코 공평하지 못하다. 이미 승부는 결정돼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아니다, 고 백날 말해도 세상은 그렇다.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세상의 '묵계'임을 안다.

'묵계'….

이게 정말 무서운 거다. 차라리 성문법처럼 한 행, 한 행,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새겨져 있다면 시비를 걸거나 뜯어고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묵계란 것, 암묵적인 동의라는 것은 '잡히는 게' 없으니 고칠 수도 없다.

'아니, 누가 못생긴 여자 차별한댔어요? 그런 거 없어요.'

그렇게 말하지만 메주처럼 생긴 여자는 면접에서 고전을 면치 못한다.

'세상에 돈이 전부는 아니잖아요.'

한심한 남자는 이 말을 믿고 성실하고 정직한 땀을 흘리며 걷고 또 걷는다. 열심히 걷다 보면 '미인'을 만날 것이라고 믿는다. 그의 수고로운 대장정을 비웃으며 '페라리'를 탄 남자가 예쁜 여자친구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 쌩 달려간다. '부모님은 내게 많은 돈을 주셨지'라는 말을 남기며.

'학벌? 중요한 것은 실력과 성실이죠.'

그러나 학벌이 낮은 사람은 면접시험 때마다 고배를 마시기 일쑤다. 어쩌면 '필기시험 성적은 좋군요'라는 말을 들을지도 모른다. 이 말은 위로가 아니라 '괜히 헛고생하지 말라'는 충고다.

회사는 예쁜 여자를, 학벌 좋은 남자를 채용하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동등한 기회를 주겠다고 했다. 무슨 말인가? 이 무지막지한 '선빵의 차별'에는 실체가 없다는 말이다.

실체가 없으니 잡아채서 난도질할 수 없고, 태워버릴 수도 없다. 이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힘은 그러나 어떤 '실체'보다 명확하고 분명한 힘을 발휘한다.

'내가 왜 싫어?'

'그냥 싫어!'

이별을 앞에 둔 연인들이 나눔직한 대화다. '그냥 싫다'는 말만큼 분명하게 싫다는 말이 또 있을까. 코를 곯아서 싫다거나 발 냄새가 싫다거나 말투가 싫다면 고치면 된다. '그냥 싫다'는 말, 실체 없는 이 말이야말로 '정말로 싫어서 죽겠다'는 말이다.

작가는 이 잡히지 않는 힘, 보이지 않는 실체를 향해 '시시하기 짝이 없는 것'이라고 비웃어준다. 그리고 보란 듯이 '선빵 맞은 그녀'를 사랑한다.

'선빵 맞은 아이는 반드시 진다' '못생긴 여자는 사랑받을 수 없다'는 통념을 향해 작가는 '펀치'를 날리는 것이다.

영화 '미녀는 괴로워'에서 못생긴 그녀는 성공을 위해, 세상의 대접을 받기 위해 '전신성형'을 감행했다. 못생기고 뚱뚱한 여자는 사랑받을 수 없다는 세상의 통념을 겸허히 인정하고, 예쁘고 날씬한 여자로 변신한 것이다. 그러나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못생긴 그녀의 변신기'가 아니다.

작가는 쳐다보기만 해도 토할 것처럼 못생긴 그녀를 성형하는 대신 '세상을 성형하라'고 외친다. 영화 '슈렉'에서 슈렉과 피요나가 입 맞추는 순간, 슈렉이 왕자로 변하는 게 아니라 피요나가 여자 슈렉으로 변하는 순간의 낯설음이랄까.

박민규는 전작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서 '경기에 이기는 것은 관심 없다. 내가 잡고 싶은 공만 잡는다'고 말했다. 이번 작품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에서도 작가는 '경쟁 따위는 집어치워'라고 말한다. 어차피 '선빵' 날리는 쪽과 맞는 쪽은 정해져 있으니 승부에 임하지 말자는 것이다.

"저는 늘 스펙만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경쟁력 없이 살 수밖에 없는 대다수 사람들을 위로하고 싶었습니다. 삼미 슈퍼스타즈가 남자들의 소설이었다면, 이번 소설은 여자들에게 위로를 줄 수 있었으면 합니다."

소설에서 작가는 이렇게 묻고 답한다.

'못생긴 여자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사랑할 수 있습니다.'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작가가 정성들여 쓴 책이다. 재능 있는 작가가 정성들여 쓴 책을 읽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419쪽, 1만2천800원.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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