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지산루, 부용대 그리고 겸암선생

입력 2009-07-14 07:00:00

하회마을 맞은편에 장하게 서 있는 바위마루가 부용대이고, 부용대 기슭에 단정하게 서 있는 서원이 화천서원이다.

몇 해 전, 학회 회원들과 함께 더운 여름 날 하루를 화천서원에서 머문 적이 있다. 서원을 둘러보던 중 누문(樓門)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 이름이 생경하였다. 지산루(地山樓). 도대체 누문의 이름이 왜 '땅'과 '산'인가? 이모저모 궁리하던 중 '겸손'이라는 의미에 생각이 집중되자 갑자기 누문의 이름이 되살아났다. 지산루와 부용대, 그리고 겸암 선생은 겸손이라는 공통분모를 갖는다. 이러한 정황을 좀 더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 '주역'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주역'에서는 겸손을 상징하는 괘가 '낮은' 땅()이 위에 있고 '높은' 산()이 아래에 있는 형상이다. 그래서 괘의 이름이 지산겸괘(地山謙卦:)인데, 괘의 풀이글에서 말하기를, "상대를 높임으로써 오히려 내가 빛이 나고, 내 몸을 낮추되 중용(中庸)의 도리를 넘지 아니하니 이것이 군자의 마침이다"라고 하였다. 즉, 지산(地山)이라는 누문의 이름은 겸(손)을 상징한다.

부용대의 지형을 살펴보면 흡사 지산겸괘의 형상을 띠고 있는 것 같다. 하회마을 쪽에서 부용대를 바라보면 상당한 높이의 바위마루(산)이다. 그런데 화천서원을 끼고 부용대 꼭대기에 올라보면 100여명은 족히 쉴 만한 평지가 펼쳐져 있다. 마치 산이 땅을 이고 있는 형국이다.

화천서원은 어떤 서원인가? 퇴계 선생의 제자이자 서애 선생의 맏형인 류운룡(柳雲龍) 선생의 학덕을 기려 세운 서원이다. 그런데 류운룡 선생의 아호가 겸암(謙菴)이다. 평생 겸손을 삶의 모토로 삼아 수양에 정진하셨기 때문에 아호마저도 겸암이라 하였다.

바로 이 점에서 지산루의 의미는 새롭게 살아나게 된다. 즉 인물(겸암), 자연(부용대), 건축물(지산루)이 모두 겸손이라는 의미를 중심으로 하여 통합적 세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옛 건축물을 답사하게 될 때마다 상징성을 중심으로 한 통합적 세계관을 강하게 느끼게 된다. 이러한 느낌은 유교 문화뿐만 아니라 불교 문화에서도 동일하게 받는다. 그렇지만 이러한 상징과 의미들은 현대로 오면서 대부분 상실되고 만다. 요즘 우리 주변에 공해처럼 넘쳐나는 수많은 이름을 살펴보라. 감각과 본능에만 호소하는 자극적 명칭, 도대체 의미가 무엇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외래어를 비롯한 숱한 비속어들이 우리 주변을 떠돌고 있다.

이름이 갖는 상징과 의미를 회복하자. 이를 통해 옛 조상들이 향유했던 격조 높은 삶의 미학을 회복해 보자.

장윤수 대구교육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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