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영국에서 쓰는 마지막 칼럼이다. 영국 생활을 정리하면서 나누고 싶은 여러 화제가 아직 많지만, e-리서치로 끝을 맺고자 한다. 왜냐하면 e-리서치는 소수 연구자들의 이슈인 것처럼 들리지만 사실, 우리 사회의 지식 기반부터 경제의 성장 동력인 신기술 개발까지 사회적으로 밀접히 연관된 중요한 주제이기 때문이다.
e-리서치는 한국에서 아직 생소하지만 영국을 비롯하여 유럽과 북미에서 점차 확산되는 용어다. 국내 및 국제 협동연구를 지원하는 영국 정부기관인 지스크(jisc.ac.uk)의 정의를 보자. e-리서치는 연구의 원활한 수행을 위해 필요한 디지털 매체와 컴퓨터 장비를 개발하고 지원하는 모든 제반 활동을 말한다. e-리서치의 개념은 원래 e-사이언스로부터 시작되었다. 하지만 e-사이언스는 이공계 연구에 한정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영국은 모든 분야의 연구를 촉진하기 위하여 e-리서치를 정책 목표로 추진하고 있다.
e-리서치는 새로운 협동연구를 유도하면서 기존 연구를 촉진하기 위한 디지털 연구 도구와 컴퓨터 장비의 지원에서부터 시작된다. 나아가 세계 수준의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서 필요한 연구 자료의 발견, 분석, 처리, 출판, 저장, 공유 등 거의 모든 연구과정을 지원하는 활동을 포함한다. e-리서치를 위해서 자주 사용되는 기술은 가상연구환경, 그리드(분산병렬)컴퓨팅, 시각화 서비스, 텍스트마이닝(문서정보 경로분석) 서비스 등이다.
그렇다면 e-리서치는 지식의 심화 및 발전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으며 사회적으로 어떤 활용가치가 있는가? 얼마 전 옥스퍼드에서 강연한 미국 캘리포니아대학의 교수이자 '디지털 시대의 學界(학계)'의 저자인 보그만(C. Borgman)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자연과학 및 공학자들뿐만 아니라 인문 및 사회학자들도 자료의 폭발적 증가와 더불어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데이터베이스와 아카이빙(저장보관기술)의 도움으로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구'경제학 자료에 대한 접근이 대폭 개선되고 있다. 또한 사람들 사이의 상호작용에 대한 대규모 정보들을 자동적으로 발굴하는 e-리서치 도구도 확산되고 있다. 이에 따라 手(수)작업에 대개 의존하던 전통적 분석방법에 변화가 초래되고 과거 한정된 자료로부터 얻어진 결과에 대한 수정이 요구되고 있다.
e-리서치로 대변되는 지적 탐구의 방법과 규모의 변화는 최근 몇 년간 국제적으로 중요한 주제가 되고 있다. 영국의 세비쥐(M. Savage)와 버로우(R. Burrow) 교수는 2007년에 공동 발표한 '경험 사회학의 위기 도래' 논문에서 e-리서치의 확산에 따라 전통적 방법론과 사회과학 이론이 무용지물화되고 있음을 경고하였다. 와이어드(wired.com)의 편집장인 앤더슨(C. Anderson)도 2008년에 게재한 기사에서 e-리서치 혁명을 크게 다루었다. 그에 따르면 e-리서치 시대에 데이터 홍수는 기존의 과학적 방법론인 수학적 모델링을 폐기시키면서 궁극적으로 '이론의 종말'을 초래하고 있다고 한다. 앤더슨은 연구자의 머리에서 나온 모델에만 의존하지 말고 페타바이트(petabyte)에 이르는 수많은 자료를 발굴하면서 이 자료로부터 직접 배워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그는 구글을 모범 사례로 제시하면서 구글에서 제공하는 첨단 서비스들은 성공적인 e-리서치 활용의 결과임을 강조했다.
선진국에서의 e-리서치 활성화 움직임에 비교해 한국은 디지털 강국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e-리서치가 아직 미성숙한 단계이다. 국가의 차세대 성장 동력을 확보하고 첨단 지식사회로 진입하기를 원한다면 e-리서치에 대한 우리 모두의 큰 관심과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 영국에서 성공한 e-리서치 도구인 '실험'(MyExperiment.org)에서 볼 수 있듯이 연구자들의 자생적 움직임과 정부 지원이 서로 결부된다면 한국에서도 e-리서치를 활용한 세계적 수준의 연구가 빠르게 발전할 것으로 기대된다.
박한우(영남대 언론정보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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