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 백두를 가다] (25)영남의 으뜸 고을, 상주

입력 2009-06-19 06:00:00

경남의 김해나 전남의 나주 들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드넓은 사벌 들과 사벌 너머 함창 땅은 사벌국과 가야, 삼국의 역사·문화를 품은 상주의 자랑이다. 사벌과 함창을 찾으면 상주가 영남의 으뜸 고을인 이유를 알 수 있다.
경남의 김해나 전남의 나주 들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드넓은 사벌 들과 사벌 너머 함창 땅은 사벌국과 가야, 삼국의 역사·문화를 품은 상주의 자랑이다. 사벌과 함창을 찾으면 상주가 영남의 으뜸 고을인 이유를 알 수 있다.

일행이 상주를 찾았을 때인 16일 상주시 낙동면 낙단교 낙동강 둔치에서 '낙동강 천년 비전 선포식'이 있었다.

놀랐다. 1만여명의 사람들이 운집했다. 모두 상주 사람들이라면 11명 중 1명이 이날 낙동강 둔치에 모인 것이다.

낙동강 천년 비전 선포식은 낙동강에서 경북의 천년 미래를 찾고, 낙동강이 경북의 미래 성장동력이어야 한다는 의미 있는 행사다. 이러한 경북의 대표 행사가 왜 상주에서 열렸고, 상주시민들이 너도나도 선포식에 몰렸을까?

낙동강은 경북의 젖줄이요, 경북의 숨결과 얼이 서린 곳이다. 상주는 낙동강의 중심 도시이고, 오랜 우리 역사 속에서 '영남의 으뜸 고을'로 자리매김해 왔다. 그래서 낙동강 천년 비전 선포식이 으뜸 고을 상주에서 열린 것이 아니겠는가. 상주는 경북의 천년 미래를 선도하는 막중한 책임을 맡은 것이다.

상주가 왜 영남의 으뜸 고을인지 고을 탐사에 나섰다.

상주시내에서 낙동강 경천대 쪽으로 가다 경천대 가기 전 좌측 도로를 달리다 보면 드넓은 평야가 시선을 확 잡는다. 경남 김해나 전남 나주의 평야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들이 눈앞에 끝없이 펼쳐졌다. 바로 사벌들이다. 일행이 이곳부터 찾은 이유는 들이라는 농촌의 풍요로움을 느끼려는 것이 아니다.

사벌은 상주의 정신과 역사를 대표하는 곳 중 하나다. 왕국의 땅이었고, 후백제 왕 견훤의 숨결이 느껴지는 곳이다. 또한 사벌 인근의 함창은 가야의 정신이 깃든 곳이다. 드넓게 펼쳐진 사벌들과 사벌 넘어 함창을 바라다보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옛날로 돌아갔다. 드넓은 사벌들의 중심에 작은 왕국이 자리했고, 왕국의 산성 안에는 크고 작은 마을들이 모여 있었다. 고대에 이어 가야, 삼국의 역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것이 아닌가.

상주의 향토사학자들은 "한 지역에서 3국의 왕을 배출한 곳은 상주뿐"이라고 한다.

곽희상 상주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의 설명은 이렇다. 역사적으로 한 지역에서 국왕을 수명 내지 수십명을 배출한 곳은 많다. 고도 경주가 그렇고, 고려 개성과 조선의 한양이 있다. 하지만 한 고을에서 세 나라의 왕을 배출한 지역은 상주뿐이다. 바로 고대 사벌국과 함창 고령가야국, 그리고 후백제의 견훤이 상주 사람이라는 설명이다. 상주는 경주와 서울, 개성과 함께 왕의 역사를 가진 곳이라는 의미다.

사벌국은 사벌면 화달리 일대에 존재했던 고대 삼한의 소국이었다. 청동기에 이어 초기의 철기 문화를 가졌고, 인구는 4천~5천가구 규모, 약 2만5천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상주지명유래총람에선 상주의 '사벌'이나 경주의 '서벌'은 '수읍'(首邑)을 뜻한다고 했고, 국문학자인 고 양주동 박사는 사벌을 '동쪽 나라' 또는 '동쪽의 머릿고을'로 풀이했다. 고대문헌인 삼국사기, 신증동국여지승람, 고려사 등지에서도 사벌국의 존재를 알리고 있다. 또 사벌면 금흔리 일대에는 원삼국시대의 산성인 이부곡토성이 자리하고 있고, 상주시 병성동과 낙동면 성동리 사이의 병풍산에는 고분군이 자리하고 있다. 상주의 향토지인 '상산지'에 따르면 "사벌국 고성이 병풍산에 있으며 성 옆에 높다란 언덕이 있으니 예로부터 사벌왕릉이라 전한다"고 기록했다. 특히 이 고분군에는 바닥 지름이 20m에 이르는 대형 고분이 많고, 내부도 대형 석실분이다. 고분군은 사벌국과 그 후 세력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단서로 이제 고분군에 대한 좀 더 정확한 발굴을 통한 실체 조사가 있어야 한다.

일행은 사벌을 지나 함창읍으로 향했다. 함창은 1914년 상주에 통합되기 전에는 함창군이었다. 그만큼 고을이 컸다는 얘기다. 함창은 가야국의 터전이었다. 가야국은 경상남북도 서부지역에 존재했던 6개의 국가들로, 562년 고령의 대가야가 신라에 넘어가면서 사라졌다. 함창의 가야는 역사적 고증이 부족해 공식적으로는 전(傳) 고령가야국이다. 고령가야국의 역사가 지금까지 전해내려오고 있다고 해서 전 고령가야국이다.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함창은 본래 고령가야국이었는데 신라가 빼앗았다"는 기록이 있고, 고령가야왕릉으로 전해지는 유적이 함창 증촌리에 자리하고 있다. 200m의 거리를 두고 2개의 큰 릉이 존재하고, 재사(齋舍)인 만세각이 있는 것으로 봐 왕릉으로 추정이 가능할 것 같았다. 역사의 진실은 문헌에 기록한 것이어야 하지만 설화나 전설 등 이야기로 된 역사도 있다. 설화와 전설이 다소 과장되거나 왜곡된 것도 없잖지만 단지 문헌으로 증명되지 않았을 뿐 역사는 분명 역사인 것이다.

상주 역사를 이야기하다 보면 견훤을 빼놓을 수 없다. 견훤은 후삼국시대의 맹주였다. 비록 왕건에게 패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한 시대를 풍미한 영웅이었다. 그 견훤이 바로 과거 상주 가은현(현재 행정구역은 문경)에서 태어났다. 상주는 어린 견훤에게 풍운의 꿈을 꾸게 한 터전이었다. 이후 전라도 땅에서 후백제를 세운 견훤은 신라와 왕건의 고려로 세력 확장을 노렸고, 드디어 경상도 땅에 발을 디뎠다. 견훤은 고향인 상주를 발판으로 위로는 왕건과 동으로는 신라와 명승부를 펼쳤다. 실제로 상주에서 속리산 쪽으로 가다 보면 화서면의 청계산 기슭에 견훤사당이 있고, 일명 대궐터로 불리는 견훤성이 있다.

견훤에 대해선 이야깃거리가 많다. 역사는 이긴 자의 전유물이 아닌가. 일행이 안동의 역사·문화를 이야기할 때 고창전투를 소개한 적이 있다. 고창전투는 견휜과 왕건이 나라의 운명을 걸고 한판 승부를 펼친 싸움이다. 이 싸움에서 견훤은 대패했다. 이후 패자인 견훤은 지렁이 설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등 이긴 자의 역사에서 혹평을 받았다. 견훤은 대구의 팔공산에서도 그 옛날 왕건과 치열하게 싸움을 벌였다. 이 싸움에선 왕건이 대패해 혈혈단신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견훤의 역사는 지금 팔공산에 남아 있지 않다. 왕건의 흔적과 전설만 내려오고 있다. 무엇을 뜻하는 걸까? 견훤은 역사의 패자이지만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해 고려를 세운 왕이다. 만약 견훤이 왕건을 이겨 후삼국을 통일했으면 지금 역사의 주인공은 바뀌었지 않았을까.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3국의 왕을 배출한 상주는 분명 우리의 역사가 시작될 무렵부터 역사의 중심에 선 영남의 으뜸 고을이었다.

이종규기자 상주·이홍섭기자 사진 윤정현

자문단 조희열 상주향토문화연구소장 곽희상 상주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강경모 상주향교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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