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상징서 쫓기는 신세로…비둘기 호시절은 갔다

입력 2009-06-13 06:00:00

'유해야생동물' 지정 후 세상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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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하잖아, 우리' 사람의 손에 개의치 않는 비둘기. 그만큼 익숙하다.
▲ '혹시 덫일지도…' 비둘기 한 마리가 사람들이 먹다 남긴 과자에 조심스레 접근하고 있다.

"여러분 안녕, '안녕'이라고 해야하는 게 맞나. 불과 얼마 전까지 '평화의 상징'이라 불러줬던 옛 정이 있는데."

그래도 기본 인사를 하는 게 예의겠지. 미안해, 내가 최근 몇 달 새 신경이 곤두선 게 사실이긴 해. 이제부터 약간은 긴장해야할 것 같아서 인사에 뜸을 들였네. 이해해 줘.

설마했는데 지난 주에 그 얘기를 확실히 들었거든. 니네 법으로 우리를 '유해야생동물'로 지정했다는 거말야. 허가만 받으면 우리를 포획할 수 있다며. 다행인지 아직 대구에서는 포획허가 신청자가 없었다고 하네. 포획허가를 신청해도 문제라더군. 환경부에서 아직 구체적인 지침을 내리지 않았다네. 관공서에서도 혹시나 누가 신청하면 어쩌나 그러고 있다네.

시절이 하수상하다 보니 우리도 만감이 교차해. 몇몇 사람은 우리 앞에 와서 키득거리더라. '나중에 BB총 들고와서 다 쏴버려야지' 라면서. 나도 참 시대를 잘못 타고 난 거 같다.

소개가 늦었네. 이름은 따로 없어. 니네들이 이름 붙인 것대로 '닭둘기'라고 불리기엔 자존심이 상하고. 그냥 부르기 쉽게 하얀 비둘기니까 '하둘기' 정도로 불러줘. 난 2·28기념중앙공원에 살고 있어. 가슴털이 유난히 하얘서 사람들 눈에 잘 띄지. 내 가슴털이 유난히 하얀 건 때가 끼어서 반들거리기 때문이기도 해."

(88 서울올림픽. 아직도 그 장면이 선하다. 하늘에 축포처럼 하얗게 퍼지던 비둘기떼. 하지만 최근 이들의 신세는 바닥에 들러붙었다. 닭처럼 뒤뚱뒤뚱 걷기만 할 뿐 날지 못한다는 비아냥에 '닭둘기'는 예사. 분뇨 등을 문제삼아 환경부에서는 이달부터 비둘기를 유해야생동물로 지정, 포획이 가능하도록 했다. 환경부는 포획방법 등에 대한 지침을 마련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유해야생동물은 인간에게 해로움을 끼친다는 판단에서 지정되는 것. 지금까지 까치, 멧돼지, 고라니, 너구리, 심지어 백로까지 때와 장소에 따라 신분의 부침을 거듭했다)

◆'하둘기'양(3년생 암컷)의 눈으로 본 세상-'먹고 살기 힘들다'

"법이 바뀌어서 우리의 생도 보장받지 못하게 됐네. 물론 아직까진 대부분이 우리에게 친절해. 배고파서 풀이라도 쪼고 있으면 새우깡 세례가 이어지니까. 부리 크기에 딱 들어맞지 않아 여러번 쪼아야되긴 해. 먹고 살기 쉽잖네. 포기한 몇몇은 다시 나무 위로 올라가서 괜히 입만 버렸다고 투덜거리지. 새우깡 뿌려두고 가만히 먹도록 내버려두는 것도 아니니까. 아이들이 우리를 쫓는단 말야. 처음엔 느린 걸음으로 뒤뚱뒤뚱 피하지만 녀석들이 마음 먹고 발길질을 할 때는 우리도 빳빳하게 날개를 펴야되거든. 긴장돼.

그러잖아도 요즘은 더워 부리를 자주 물에 들이대는데, 그런 방해가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란 말야. 그걸 피하려 날개라도 푸득대면 다들 입을 막더군.

어쩌다 이렇게 천덕꾸러기 신세가 됐는지. 뭐가 그리 거슬리냐. 우리를 퇴치하는 방법은 물론 심지어 퇴치회사까지 생겼더라. 매를 닮은 풍선을 달아놓고, 둥지에다 찍찍이 붙여서 털 다 뽑히게 만들고. 내가 그렇게 해롭니. 많다고 죽이자는 얘기까지 하냐.

우리가 이렇게까지 빠르게 번식하고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니네가 뿌리는 새우깡도 한몫 하지만 니네가 더러워서 그런거야. 음식물쓰레기를 함부로 처리하잖아. 니네가 던져주는 모이와 여기저기 널린 쓰레기는 우리가 하루에 필요한 먹이의 양인 50g가량을 한방에 먹어치울 수 있게 하니까. 우리의 평균 몸무게가 500~600g 이라는 걸 감안하면 적잖은 양이지. 이런 환경에 있으니 우리가 어렵게 먹이를 구하러 다닐 필요가 없잖아.

등 따시고 배부르면 여유시간이 늘어나고, 이 시간의 대부분을 번식에 힘쓰는 거지. 니네한테도 누가 먹을 거 계속 주면 일할 사람 있을까. 특별히 움직이지 않아도 온갖 곳에서 먹을 걸 주는데 지금은 지상낙원이나 다름없지. 매·독수리같은 천적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자연수명을 유지하고 저 세상으로 가는 거지.

그런데 니네는 정말로 우리를 총으로 쏘든, 투망을 던지든, 어떤 식으로든 잡아 없앨거니? 몇 년 뒤에는 비둘기 복원한다는 이야기가 신문지면에 소개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냐. 어떤 사람들은 정력에 좋다는 소문, 몸에 좋다는 소문이 나면 자연스럽게 개체수가 조절될 거라고 하더라. 이래 죽나, 저래 죽나 마찬가지지만. 몸에 좋네 어쩌네 하는 말을 억지로 퍼트리진 말았으면 해. 본초강목에 반구(斑鳩·염주비둘기)는 성질은 평하고 맛이 달며 독이 없는 약재로 눈을 밝게 하고 음양의 기를 보하며 돕는다라고 나와있긴 하단다. 마술에 가끔 이용되는 우리 친척이 염주비둘기인데 우리랑 달라."

◆다음은 2·28기념중앙공원 무리의 리더, '비둘통'씨(5년생 수컷)와 일문일답

-진균병, 분뇨가 문제라는데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은 없나요? 댁들만 유독 문제가 되는 이유가 있나요?

▶요산이 문제가 되긴 합니다. 변 속 대장균도 문제가 되고요. 그 때문에 유럽 등 일부 지역에서는 비료로 쓰이기도 했지요. 하지만 우리뿐 아니라 알게 모르게 시민들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새들 모두 그 정도의 균은 뿌리고 다닙니다. 그렇다고 다들 죽일 겁니까?

-각기 가족별로 생활 테두리가 정해져 있는 것 같습니다. 실제 2·28기념중앙공원에는 23마리의 고정멤버가 있는데요.

▶번식지 중심 영역이 있고, 먹이를 구하는 영역이 따로 있습니다. 번식지를 알려주는 것은 대외 비밀에 해당되기에 알려드릴 수 없는 점 양해바랍니다. 먹이 영역의 경우 좁게는 몇 백m에서 넓게는 1km까지 영역이 정해집니다. 자신의 영역을 지키는 습성 때문에 전쟁터에서 우리를 이용하기도 했지요. 멀리서 우리를 풀어놓고 원래 집으로 찾아오게끔 하는거지요. 카메라를 우리 목에 달아놓고 말이죠.

-집단 생활을 한다는 얘긴데요?

▶대부분 가족입니다. 리더는 어디에 먹이가 있고 쉴 곳이 있는지, 어디가 위험한지 아는 거지요. (그는 몸을 부풀려 자신의 가슴을 한껏 뽐냈다. 다른 비둘기에 비해 털이 많은 것처럼 보였다.) '비둘기처럼 다정한 사람들이라면…' 뭐 이런 노래도 있는 것 같던데. 사실 우리는 리더가 다 해먹는 구조지요. 저같은 수컷 1마리가 다른 암컷을 좌지우지합니다. 종족 보존의 특성 때문이기도 하지요.

-만일 집단 포획이 일어난다면 집단 반발할 계획이라도 있으신가요?

▶생각하기도 싫은 부분입니다. 스트레스로 인한 집단 공격 양상을 나타냈다는 기록은 없지만, 집단학살을 겪으면 정신병적 현상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새끼를 돌보지 않으려 하기도 해요. 말이 나온 김에, 왜 굳이 포획에 초점을 맞추는지 이해할 수 없군요. '가족계획'이라는 좋은 방법도 있지 않습니까. 앞서 우리 하둘기양이 말한 대로 먹이를 뿌리지 마세요. 그러면 먹이를 구하기 위해 우리도 움직일 테고. 등 따시고 배불렀던 시절 다 지난 걸 우리가 깨닫게 되면 자연스레 알도 적게 낳을 겁니다.

-더위먹는 경우도 있나요? 하루 수분 섭취량은 어느 정도입니까?

▶더위의 영향보다는 먹이와 연관이 있지요. 칼륨이 많은 인스턴트 음식을 자주 섭취하니 몸이 비대해지고 물이 당기는 거지요. 다른 새들에 비해 많이 마시긴 합니다. 정확히 재보지 않아 어느 정도 마시는지 알 수 없지만 학계에서는 일반 새보다 확실히 많이 마신다고 하더군요. 사람으로 치면 '서구병' 비슷하게 된 거지요. 뚱뚱해지다보니 차에 깔려죽기도 하고 들고양이나 개에게 물려 죽는 경우도 있습니다. 과비만, 이거 정말 문제입니다. 정기적으로 날아줘야하는데 걸어서도 충분히 음식을 구할 수 있으니 딱히 날아야할 이유가 없어진 거지요. 기껏해야 아이들의 발길질을 피하는 정도입니다.

-'못 나는 새'라는 비아냥도 있습니다.

=-▶움직이지 않아서 그렇지 마음만 먹으면 잘 날아다닙니다. 뱀, 독수리, 매 등 천적이 없어 딱히 폼잡고 날 일이 없지요. 그 때문에 자연수명인 5~10년을 그대로 다 누립니다. 제가 나는 걸 한 번 보시죠.

-잠깐, 다리에 붙은 실은 뭐죠?

▶저는 약과에요. 댁들이 더 잘 알잖우. 다리 안 잘린 게 다행이지.

(쓰레기가 많아 실에 감기기도 하고, 낚시줄에 걸리면 다리가 잘리기도 한단다. 매처럼 온몸을 웅크려 도심의 하늘로 쑥 빨려든 비둘통씨는 그렇게 날더니 새우깡이 뿌려지자 다시 뒤뚱거렸다.)

김태진기자 jiny@msnet.co.kr 사진·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이 기사는 4일부터 8일까지 닷새간 2·28기념중앙공원에 있는 비둘기 23마리의 동선과 양상을 관찰한 결과를 바탕으로 했으며, 박희천 경북대 조류생태환경연구소장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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