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욱의 달구벌이야기]20. 성밖골목

입력 2009-06-11 11:36:23

이상화'이인성 등 예술가들을 매료시킨 골목길

성밖골목, 약전골목 남쪽의 골목을 그렇게 불렀다. 예전에는 '앞밭골' 또는 '앞밖걸'로 불렸는가 하면, 영남대로'경부가도로 불리기도 했다. 부산에서 서울로 '과거보러' 가던 길이었고, 대구를 지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그 뒤 대구읍성이 헐리자 성벽 양쪽으로 집들이 들어서면서 골목 형태를 이루었다. 그리고 앞밭골과 계산동 사이에 '뽕나무 동네'가 있었다. 이곳의 지명은 명나라 장수였다가 뒷날 조선에 귀화한 두사충이 뽕나무를 심고 비단과 관련된 업을 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의 고택은 한국전쟁 이후 다른 사람에게 팔렸고, 지금은 흔적을 알 수 없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계산동에 해당된다.

계산성당은 도심에서 가장 아름답고 역사적인 공간이다. 당시 조선 사회는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심했다. 그래서 읍과 멀리 떨어진 '신나무골'에 숨어서 살았다. 초대 신부로 부임한 김보록 바오로 신부는 낮에는 바깥 출입을 삼가고, 밤이면 변복을 하고 신도들을 찾아다니며 전도하였다. 그러다가 지금의 계산성당 자리에 터를 매입해 '성모성당'을 지었다. 그 뒤 계산성당이라 고쳐 불렀고, 두 차례에 걸친 증축으로 오늘의 모습을 갖추었다.

처음 그 자리에는 근대적 교육기관인 해성재(海星齋 : 효성초등학교의 전신)가 있었다. 그 같은 역사성을 감안하여 도심에서 유일하게 문화재보존지구로 지정되었다.

계산성당 마당에는 '이인성 나무'로 불리는 해묵은 감나무가 서 있다. 또한 한국전쟁 이후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결혼한 곳이자, 199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문한 곳이기도 하다.

계산동 일대에는 근대 민족운동가와 예술가들이 많이 살았다. 민족운동가 서상돈, 독립운동가 이상정, 민족시인 이상화, 뒤에 국회의장이 된 시인 한솔 이효상, 서예가 박기돈, 청구대학 설립자 최해청, 평론가 남만희, 소설가 현진건, 시인 신동집, 작곡가 김진균, 음악가 박태원과 박태준 형제, 서양화가 서동진과 이쾌대, 민족시인 백기만 같은 이들이 이 부근에 살았다. 그리고 죽농 서동균의 서실이 있었고, 길 건너편에 화가 이인성의 양화연구실이 있었으며, 미술사가였던 김용준의 집이 있었다. 그만큼 문화인들이 살아가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계산성당과 인접하여 이상화의 옛집이 있다. 주상복합건물 미소시티(옛 고려예식장 자리) 뒤쪽에 있는 이 건물은 이상화가 말년에 살았던 곳이다. 그 뒤 소유자가 바뀌는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기부채납의 절차를 거쳐 옛 모습대로 복원해 놓았고, 이상화기념사업회가 맡아 관리하고 있다. 그 밖에 고려예식장과 요정 일심관이 있었다. 고려예식장은 지역 예식문화의 명소였고, 일심관은 춘앵각과 더불어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었다. 그리고 오랜 세월 지역여론을 선도하는 매일신문사가 자리 잡고 있다.

이따금 골목길을 걸으며 생각해 본다. 자신들의 생업에 자부심을 갖고 열심히 살아가는 순박한 사람들,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매력으로 가득한 오래된 골목길, 이 모두가 나를 흐뭇하게 만든다. 어쩌면 욕심 내지 말고 지금의 삶을 즐기며 살아가라고 일깨워 주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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