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산동에서]前정권 격하, 반복되는 역사

입력 2009-06-02 06:00:00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제 신화가 됐다.

그는 대통령직에서 내려오는 순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인물에 불과했지만 시시각각 자신과 주변을 옥죄어오는 정권의 압박에 죽음으로 저항함으로써 역사를 넘어선 것이다.

그는 불행한 우리 현대사의 희생양이다. 현 정권이 전(前) 정권의 비리를 단죄하고 격하시키는 정치상황을 참아내지 못했다. 그의 지지자들 역시 "아무도 원망하지 말라"며 국민통합을 바랐던 그의 유언을 지키지 않을 모양이다. 검찰의 전방위 수사로 믿었던 도덕성의 한쪽 귀퉁이가 무너지면서 그가 면목없어하자 '친노'였다는 사실을 감추려했던 인사들마저 그의 죽음을 '정치 보복'으로 규정하고 현 정부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에 나서고 있다.

씁쓸하다. 그를 죽음으로 내몰면서 역사에서 신화로 내몬 것은 우리 모두의 공동책임이다. 우리 모두 전임자를 단죄하고 격하하는 검찰 수사에 박수를 쳤다. 우리도 그의 말투가 대통령의 그것이 아니라 시정잡배의 그것이라는 보수언론의 꼬드김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비난하지 않았던가.

노 전 대통령 역시 '국민의 정부'를 이어받았으면서도 전 정권과의 차별화를 추구했다. 전임자와의 차별화, 혹은 비리 단죄를 통한 집권기반 확보는 참을 수 없는 권력의 속성이다. 구소련의 흐루시초프에 의해 단행된 '스탈린 격하운동'을 통해 극명하게 드러난 '전임자 죽이기'는 우리 정치사에서도 예외가 없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유신시대와의 단절을 선언했고 노태우 전 대통령은 전임자를 백담사로 보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역사 바로세우기를 명분으로 두 명의 전임자를 감옥으로 보냈고 김대중 전 대통령 역시 전임자와의 차별화에 앞장섰다.

직전 정권을 격하하고 파괴하려는 충동은 현대사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 전반에 걸쳐 지속적으로 반복돼온 일이다. 우리는 역사를 존중하지 않는 '고약한' 습관이 있다. 오죽했으면 현직 대통령이 동시대의 역사를 바로잡겠다며 '역사 바로세우기'를 주장하고 나섰을까. '천년왕국' 신라를 무너뜨린 고려는 신라를 계승하지 않았다. 새로운 국가의 이데올로기를 위해 옛 제국의 오랜 문화적 기반을 무너뜨리고 파괴하는 데 앞장섰다. 고려를 무너뜨린 조선 역시 똑같은 전철을 밟았다. 우리나라에 시대를 넘어 천년을 이어 온 문화재가 많지 않은 것은 역사 파괴가 주원인이다.

미국 오바마 대통령은 최근 부시 대통령 시절 '테러와의 전쟁'을 명분으로 자행됐던 각종 인권유린 실상 공개에 반대하고 나섰다. '부시 전 대통령 격하운동'에 제동을 건 것이다. 부시시대를 청산하는 정치적 계산보다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때문이다.

'참여정부' 시절에도 우리는 과거청산에 매달렸다. 정권이 바뀌자 '참여정부'는 청산 대상이 됐다. MB정부도 조만간 도마에 오를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친노 인사들은 "우리가 정권을 잡는다면 MB와 친한 특정기업 한 곳을 골라 집중적으로 조사를 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느냐. 이제 '털면 털리는' 시대가 됐다"고 말하기도 한다. 3년 후 퇴임하는 이명박 대통령을 겨냥한 무시무시한 독설이다.

이를 곧이 곧대로 듣는다면 한나라당은 정치보복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정권을 내놓지 않으려 할 것이고 우리 정치는 불행한 악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전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 통과의례처럼 당연시되어온 불행한 역사는 노 전 대통령의 죽음으로 끝내야 한다.

서명수 (서울정치팀장 diderot@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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