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부] 묘비명

입력 2009-05-29 11:03:49

고인을 기념하기 위해 묘비에 명문이나 시문을 새긴 것이 墓碑銘(묘비명'epitaph)이다. 죽은 자는 침묵하지만 묘비명은 그 사람을 얘기해 준다. 묘비명엔 고인의 삶과 가치관이 또렷이 담겨 있다.

'희랍인 조르바'로 유명한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롭다"는 묘비명을 남겼다. 자유로운 영혼을 갈구하며 치열하게 살았던 작가의 인생과 혼이 묻어난다. 데카르트와 칸트의 묘비명은 역시 철학자답다. "고로 여기 이 철학자는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데카르트),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점점 더 커지는 놀라움"(칸트)이란 글귀를 남겼다. "브루스 리, 절권도의 창시자"란 이소룡의 묘비명도 인상적이다.

죽음과 연관됐다고 해서 묘비명 모두가 엄숙하고 딱딱한 것만은 아니다.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버나드 쇼), "일어나지 못해서 미안하오"(어니스트 헤밍웨이), "이 사람은 하늘에서 번개를, 폭군에게서 옥띠를 빼앗았다"(벤저민 프랭클린), "세상에서는 토정을 잘 알지 못하고"(이지함), "괜히 왔다 간다"(중광 스님)와 같은 묘비명은 죽음마저 넘어서는 위트가 번뜩인다. "최상의 것은 앞으로 올 것이다"는 프랭크 시나트라의 묘비명도 삶과 죽음의 의미를 곱씹게 한다.

서거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오늘 영결식에 이어 영면에 들어갔다. 노 전 대통령은 유서에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기라"고 적었다. 고인의 뜻에 따라 봉하마을 사저 주변에 비석을 세우기 위한 '아주 작은 비석 건립위원회'가 구성됐고 1차 예비회의에서 비석 위치와 크기, 비문, 글씨체 등을 논의했다. 비석은 노 전 대통령 49재인 7월 10일쯤 세워질 것으로 보인다.

일부에서는 노 전 대통령의 비문은 그가 남긴 유서 내용으로 새겨질 것이란 얘기도 흘러나오고 있다. 유서에 노 전 대통령의 평소 생각이 담겨져 있다는 게 그 이유다. 비문에 시민들의 추모글을 최대한 많이 반영할 것이란 얘기도 있다. 어떤 글귀가 새겨지든 노 전 대통령 묘비명을 통해 많은 사람이 자신을 되돌아보고, 후회 없는 삶을 살기 위한 성찰의 기회를 갖게 되기를 바란다. 나아가 노 전 대통령이 남긴 화합과 화해의 메시지가 온 누리에 퍼져 나가고, 국론 통합을 위한 주춧돌이 되기를 기원한다.

이대현 논설위원 sk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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