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하마을 입구 걸개에 쓰여 있는 그의 유서는 한편의 시 같다. 리듬도 있고 선명하다. 글쓰기를 조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아침에 일어나 20분 만에 뚝딱 완성한 글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공굴러진 것이거나 여러 번 고쳐 완성한 글임을 짐작할 수 있다. 아마도 그는 꽤 긴 시간 마지막을 생각해 온 듯하다.
유서의 문장은 아주 간결하다. 뼈대로만 이루어져 있다. 하고 싶은 말을 덜어내고 또 덜어낸 끝에 얻어질 수 있는 문장이다. 이 글을 보면 그가 김훈의 책을 좋아하는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김훈의 간결한 문체에 상당히 매료된 듯하다. 작가의 문체는 수식어가 거의 없고 골격만 있다. 그래서 전달력은 크고 무게는 진하다. 그의 유서도 이런 문체를 닮아 군더더기가 없다. 구질구질한 것을 싫어하는 그의 성격 그대로다. 단선적인 그의 화법도 글과 흡사하다.
대개 유서는 글의 성격상 어쩔 수 없이 격하거나 자신에 대한 변명이나 미련이 담겨 있기 쉽다. 그러나 그의 글에는 흔들림의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자존심으로 꾹꾹 눌러 썼다. 마치 죽음을 멀찌감치 놓고 쓴 듯 담담하여 충동적으로 저지른 죽음이 아니라는 것을 웅변하고 있다. 마지막까지 자존심을 잃지 않으려는 모습이 역력하다.
아내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 유서는 참으로 야속하다. '슬퍼하지 마라, 미안해하지 마라, 원망도 하지마라, 운명이다'. 수십년 남편의 곁을 지키며 좋은 일도 나쁜 일도 함께 나누었던 아내에게 이 차분하고 담담한 글은 아주 냉정하다. 그래서 더 고통스러울 것 같다. 차라리 희미한 흔들림이라도 있었다면 덜 힘들었을 것이다. 한 치의 감정도 허용치 않으려는 이 유서는 지금 그녀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후회와 한을 심어줄 듯하다.
오래 전 책에서 본 한 구절이다. 작가인 남편을 여읜 아내는 우연히 책을 펼치다 남편의 것으로 보이는 흰 머리카락을 발견한다. 그녀는 머리카락 한 올을 조심스럽게 건져 올려 마치 남편을 보듯 만져보고 햇빛에 비춰보면서 그를 추억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이 작업을 통해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는 볼 수 없는 고통의 무게를 말했고 만지고 싶어도 만질 수 없는 '없음'의 의미를 설명하려 했다.
오래된 부부가 어느날 갑자기 혼자가 된다는 것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고통일 것이다. 더욱이 말 한마디 없이 훌쩍 떠나가버렸을 경우에는. 자존심 강한 남편은 아내를 더 외롭고 힘들게 하면서 떠난 듯하다.
sjki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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