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in 여성]양구이 전문점 '봉희가든' 최봉희 사장

입력 2009-05-28 06:00:00

'양구이', 왠지 낯설다. 자칫 양(羊)고기라 착각할 수도 있다. 양구이의 '양'은 소의 위(胃)를 말한다. 양구이는 소의 위를 감싸고 있는 근육을 잘 다듬어 불판에 구워먹는 요리. 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그리 흔한 음식은 아니다. 더구나 대구에서 이를 전문적으로 하는 음식점이라곤 손가락을 꼽을 정도다.

봉희가든(대구 수성구 황금2동)을 운영하는 최봉희(51) 사장. 30년 가까이 양구이만을 악착같이 고집해온 양구이의 산 증인이다. 양의 질긴 껍질을 뜯어내고 칼질을 해대기를 수만 번도 더 했을 터. 그녀의 가냘픈 손 곳곳엔 칼자국과 굳은살이 훈장처럼 아로새겨져 있다.

어릴 때부터 손맛이 남달랐던 그녀가 양구이 전문점을 연 것은 1980년. 대구 중구 남일동에 자신의 이름을 따 '봉희가든'이란 간판을 내건 것. "양구이가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린 건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이 크죠. 고향인 포항에서 부산 친척집에 놀러갔을 때였어요. 도로가 너무 막혀 알아보니 박 전 대통령이 부산의 유명한 양구이집을 찾아 그 동네 교통이 차단됐기 때문이더라고요. 박 전 대통령으로 인해 부산 양구이가 유명해졌죠. 저도 한번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3개월가량 부산의 한 양구이집에서 잡일을 해가면서 속성으로 배웠죠."

초반엔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오전에는 안내장을 들고 시내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와중에 경비원들에게 문전박대를 당하는 경우도 숱했다. 발품을 판 지 6개월 정도가 지나자 식당에 손님이 꽉 들어찼다. 그때부턴 맛과 서비스로 승부하기 시작했다. "당시 몇몇 양구이집들은 외상으로 재료를 다 사더라고요. 하지만 저는 철저하게 현금을 줬어요. 그렇게 하니 자연스레 공급상들이 좋은 재료를 주더라고요. 그것이 손님들에게 인정받았던 이유인 것 같아요."

양구이는 당시 최고급 음식이었다. 서민들은 구경도 못할 정도로 비쌌다. "80년대엔 양구이 고기 한점이 쌀 두 되 값이었어요. 비싼 음식점 중에서는 당시 1인분에 2만원을 받기도 했다. 지금으로 치면 20만원 이상의 가치죠." 그렇다 보니 음식점을 찾는 사람들 대부분은 고위층이었다. 대구의 웬만한 고위층은 한 번쯤 그녀의 음식점을 들렀다. 이런 이유로 그녀는 이른바 '마당발'이란 소리를 듣기도 한다.

비싼 만큼 건강에도 좋은 법. "보통 소가 근육이 생기려면 여섯살가량 돼야 하죠. 하지만 건강하지 못하면 근육도 거의 없어요. 건강할수록 근육이 두껍고 많죠. 결국 양은 건강한 소에게서만 가져올 수 있죠. 고단백질이라 살이 전혀 찌지 않고 숙취 해소나 보양에 그만이지요."

하지만 요리하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다. 무엇보다 질기고 노린내가 심하다는 것. 이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 양구이의 관건이다. "껍질을 4차례에 걸쳐 벗겨야 하는데 이 과정이 보통 일이 아니에요. 지금은 요령이 생겼지만 양구이 시작하던 초반엔 너무 힘들어서 눈물'콧물을 많이 흘렸죠. 일반 사람들은 껍질이 얇고 질겨 하루종일 매달려도 못 벗길 거예요." 양 특유의 노린내를 제거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양을 숙성시켜 노린내를 제거하는 소스 개발에만 15년을 투자했다. 30년 내내 몸살이 나지 않는 한 매일 주방에서 살다시피 해 얻은 결실이다.

그의 장인 정신이 30년 동안 불황을 모르게 만든 비결이었다. "고객만큼 정직하고 똑똑한 사람들이 없어요. 그들을 꾸준히 만족시키기 위해선 자신을 버리는 수밖에 없죠. 고단하고 힘들다고 게을리했다간 이내 표시가 나요. 대신 정성을 쏟는 모습을 손님들은 틀림없이 알아주죠."

그는 1990년대부터 여유가 생기면서 지역사회에 여러 가지 후원도 틈틈이 해오고 있다. 소년소녀가장 돕기나 대구FC 후원은 물론, 의경들이나 노인들의 게이트볼 행사 때 국밥을 무료로 나눠주는 등 크고 작은 '환원사업'을 꾸준히 펼치고 있는 것.

"일에만 매달리다 보니 취미생활도 맘놓고 못했죠. 이젠 자식들도 어느 정도 자립했기 때문에 즐기면서 살고 싶어요. 돈 버는 목적보다는 여가를 좀 즐기면서 베푸는 삶을 살고 싶어요."

전창훈기자 apolon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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