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미술] 뉴욕에서 온 변종곤

입력 2009-05-15 06:00:00

"물감 없어 그림 못그릴때 작품 할 대상 찾아다녔죠"

▲ 뉴욕 작업실에 앉아 있는 변종곤. 그의 작업실은 자체가 하나의 작품이라고 할 만큼 수 많은 오브제들로 가득 차 있다.
▲ 뉴욕 작업실에 앉아 있는 변종곤. 그의 작업실은 자체가 하나의 작품이라고 할 만큼 수 많은 오브제들로 가득 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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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IENNA 1761'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을 포함해 미국 인디애나폴리스 미술관, 알바니 미술관, 클리브랜드 미술관 외에 파리, 도쿄 등 세계 정상급 미술관에서 작품을 소장하고 있으며 2007년 뉴욕에서 활동하는 대표적 한국 작가로 선정돼 '세계 속의 한국미술'전에 초청됐다. 뉴욕 타임즈 등 언론과 평론가들은 극사실주의의 대가, 혹은 풍자가라 부르며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오래된 바이올린, 고장난 시계, 벼룩시장에서 구한 골동품 액자 등 시간의 흐름이 담겨 있는 물건을 소재로 즐겨 사용하는 작가에 대해 2000년 뉴욕 타임즈는 문화면 전면을 할애해 '삶 자체가 예술'이라며 찬사를 보냈다.' 1948년 대구에서 태어난 재미화가 변종곤을 짧게나마 설명한 말이다.

서울 청담동 '더 컬럼스 갤러리'에서 30일까지 열리는 '예술 속의 대가들(Icons of Art)' 전시를 맞아 변종곤이 대구를 찾았다. 수성구 범어동 문화공간 '필름통'에서 열린 초청 강연에는 마치 비밀결사 조직처럼 입소문을 듣고 찾아온 미술학도 20여명이 자리를 차지했다. 1978년 제1회 동아미술대전에서 대상을 받으며 화단의 주목을 받은 변종곤. 하지만 그는 1981년 쫓기듯 미국으로 건너갈 수 밖에 없었다. 당시 대상작은 철수한 미군 기지를 그린 작품. 불안한 정치상황 속에서 창작의 자유는 보장받지 못했다. '밥통 하나' 달랑 들고 건너간 뉴욕에서 '짐승 같은 굶주림의 시대'를 보내야 했다. "불평할 때가 가장 중요한 기회이며, 불편할 때가 바로 길이 보일 때"라고 말하는 작가는 20kg 넘게 줄어든 몸뚱이를 허위적거리며 뉴욕 할렘 거리를 헤맸다. 아니 찾아다녔다. 물감이 없어서 그림을 못 그린다고 불평하기보다는 물감을 대신해서 작품을 할 수 있는 대상을 찾았고, 거리에 버려진 물건들을 재조합해 새 생명 불어넣기를 시작했다.

"길을 헤매다 보면 방금 누군가 흘린 따뜻한 피를 만질 수 있습니다. 칼에 찔리거나 총에 맞은 뒤 흘린 피죠. 바로 그곳이 할렘이었습니다." 비가 새는 할렘의 한 구석방에서 변종곤은 인간에게 버림받아 잔뜩 화가 난 물건들을 어루만지면서 온기가 도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전혀 이질적인 물체들을 결합해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했고, 부족하다 싶으면 그림을 그려 넣었다. 28년간 뉴욕에 머무는 동안 생계를 위해 다른 직업을 가진 기간은 고작 3개월. 바나나와 무료 시식용 일본 라면만으로 일주일을 버티기도 했다. 하지만 작가는 무려 120블록을 걸어서 미술 공부를 하러 다니는 열정을 불태웠다. 힘든 시기, 종교도 없었지만 신에게 이렇게 물었다. "도대체 나를 얼마나 좋은 작가로 만드려고 이러십니까?" 그러면서도 세상을 미워하기는커녕 삶과 사람에 대한 사랑은 갈수록 깊어갔다.

이번 전시에는 마르셀 뒤샹, 르네 마그리트, 만 레이, 앤디 워홀, 백남준, 요셉 보이스, 르 코르뷔지에, 모차르트 등 20세기 대표적인 예술가들을 오래된 현악기와 결합시킨 걸작 16점이 최초로 선보인다. 특히 작품 'VIENNA 1761'의 첼로와 나무로 된 악기 케이스는 200여년이 넘은 명기(名器)로서 작가가 18년 전 뉴욕 경매에서 구입한 것으로 모차르트를 찬미하는 작품으로 변신했다.

세상의 수많은 찬사와 수식어 중 무엇이 가장 인상 깊었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 "나는 늘 화가로 불리고 싶다. '화가'는 '화가 난 사람'이란 뜻이기도 하다. 세상과 타협하기 보다는 늘 긴장하고 불편한 상태여야 한다. 그것이 화가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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