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난 요정 즐비 '기생의 거리'로 유명
'종로'는 고유명사가 아니다. 흔히들'종로'라고 하면 서울의 '종로'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전국 여러 곳에 '종로'가 있다. 종을 쳐서 시간을 알리는 종루, 다시 말해서 '종을 매다는 누각이 있는 거리'를 일컫던 말인데, 조선조 초기부터 그렇게 불렸던 것 같다. 달구벌의 종루는 경상감영의 남문인 영남제일관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저녁 여덟 시가 되면 네 성문이 닫히면서 통행을 금지했다고 한다. 그로 미루어 보아 매일 해뜰 무렵과 해질 무렵에 종을 쳤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대구읍성 시대의 종로는 영남제일관에서 홍살문(지금의 만경관 앞 네거리)을 지나 포정문에 이르는 거리를 가리켰다. 그러나 1900년대 대구 지도에는 지금의 종로는 물론 경상감영에서 달서문(지금의 아미고 호텔 뒤쪽)에 이르는 거리까지 종로라 표기돼 있다.
대구의 종로 거리는 '기생의 거리'로 널리 알려졌다. 그도 그럴 것이, 기생들을 교육시키던 사설학원인 달성권번을 비롯해 이름난 요정이 즐비했었다. 그 시절 요정은 창과 춤과 예절을 배운 기생들이 출입하던 곳이라 나름대로 격이 있었다. 그들 가운데는 시를 짓고 창과 가야금을 잘하는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국채보상운동에 기금을 낸 지조 있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나중에 명창이 된 사람도 있었다.
구한말부터 자리 잡은 화교들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1905년부터 화교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해방 직후 화교들의 경제활동이 크게 번창하면서 종로 일대의 부지를 매입하여 특색 있는 건물을 지었다. 당시 대구 화교의 지도자였던 모문금(慕文錦)'연보주(連寶珠) 같은 이들의 역할이 컸었다. 화교협회'화교 소학교와 중학교'화교성당'화교교회, 그리고 1920년대에 문을 연 지역 최고의 청요릿집 군방각 같은 건물들이 들어섰다. 이들 건물은 중국인 기술자들이 평양에서 구워온 붉은 벽돌과 금강산에서 베어온 나무로 지었다고 한다.
대구에는 차이나타운이 없다. 그러나 이 땅에 정착한 지 100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날, 그들 특유의 생활력과 연대감을 바탕으로 음식점'식료품 가게'관련 사업을 경영하면서 생활 터전을 넓혀 나가고 있다. 그런가 하면 지역사회 발전에도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다.
오늘날 종로는 번화했던 예전의 종로거리가 아니다. 그때 그 시절의 풍류며 생존 의지 같은 것을 찾아볼 수 없다. 이따금 나이 든 사람들이 그 시절의 추억을 더듬으며 돌아보는 곳으로 시들고 말았다. 하기야 세상사 흥하면 쇠하는 법, 세월은 가고 추억은 쌓이게 마련이다. 향수란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추억이자 그리움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 또한 약령시를 거쳐 종로거리를 걸으면서 지난날을 되돌아볼 때가 있다. 그와 함께 인접한 진골목과 약전골목을 연계한 특색 있는 거리로 가꾼다면 관광명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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