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한명기지음/푸른역사 펴냄
병자호란(1636년 12월∼1637년 1월) 때 인조 임금은 항복을 결정했지만 남한산성 밖으로 나오지 않고 버텼다. 성밖으로 나와 항복례를 하는 대신 성 안에서 성 밖의 청 태종을 향해 요배(遙拜)하겠다고 고집했다. 여기에는 항복 뒤 청 태종이 자신을 심양으로 끌고 갈 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작용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청태종 앞에 무릎 꿇고 항복할 경우 신료들이 던질 냉소로 왕위를 유지하지 못할 것이라는 위기 의식이 크게 작용했다. 그러지 않아도 인조는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이른바 '정통성'에 다소 부담을 느끼고 있던 터였다. 인조는 성밖으로 나오는 대신 청 태종에게 편지(국서)를 썼다.
'신에게 안타깝고 절박한 사정이 있기에 폐하께 호소하려 합니다. 동방의 풍속은 궁박하고 편협하여 예절이 너무하리만큼 꼼꼼합니다. 임금의 행동을 보아 조금이라도 상도(常度)와 다른 점이 보이면 놀란 눈으로 서로 쳐다보며 괴상한 일로 여깁니다. …예로부터 국가가 망한 이유가 오로지 적병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비록 폐하의 은덕을 입어 다시 나라의 주인이 된다고 하더라도, 오늘날의 인정을 살펴보건대 반드시 신을 임금으로 받들려 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신이 크게 두렵게 여기는 바입니다. 폐하께 귀순하도록 허락하신 것은 대체로 소방의 종사를 보전시키려 함인데, 만약 이 한 가지 일 때문에 나라 사람들에게 용납되지 못한 채 끝내 멸망하고 만다면 이는 분명히 폐하께서 감싸주고 돌보아 주시는 본뜻이 아닐 것입니다.' -청 태종 실록 권 33-
인조가 이처럼 사정했지만 청 태종은 들어주지 않았다. 그는 끝내 인조가 성밖으로 나와서 항복례를 해야 한다고 명했다. 사실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가 남한산성을 직접 공략하지 않았던 것은 '힘'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이제 막 천하를 제패하기 시작한 청나라는 무력으로 조선을 깨부수는 게 아니라 조선왕의 '자발적 항복'을 받고 그를 통해 천하에 권위를 알리고 싶었던 면이 있었다.
식량 부족과 사기 저하로 더 버틸 수 없었던 인조 임금은 성밖으로 나와 삼배구고두례를 행했다. 성밖의 조선 백성들이 청군의 노략질로 수없이 죽어간 후였다.
인조의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항복 이후 조사(朝士)들 사이에 조정에 출사하는 것을 기피하는 풍조가 번져갔다. 잇따라 휴가를 내는가 하면 출사하지 않는 것을 고상하게 여기는 분위기도 나타났다. 인조가 항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경상우도 등에 남아 있던 광해군 당시 대북파의 잔여 인물들은 소를 잡아놓고 잔치를 벌였다.
병자호란이 인조 임금에게 항복례의 치욕과 권좌에 대한 불안으로 남았다면 백성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슬픔이었다. 1637년 조선이 청에 항복한 후 심양으로 끌려가던 백성들은 추위와 배고픔에 쓰러져 죽어갔다. 탈출을 시도하다가 청군에 살해된 사람들도 많았다. 여성 포로들의 비극은 더했다. 많은 여인들이 청군 장졸들의 첩이 되어 노리개로 전락했다. 천신만고 끝에 심양에 도착한 뒤에도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조선 원정에 나섰던 남편이 첩을 데리고 나타나자 청군의 아내들은 질투에 몸을 떨었다. 어떤 여인은 끓는 물을 부어 첩을 괴롭히기도 했다. 그 행위가 워낙 잔혹해 청 태종 홍타이치조차 격분했다. 청 태종은 "이렇게 잔인한 투기를 일삼는 여인들은 남편이 죽을 때 순사시켜 버리겠다"고 공개적으로 경고하기도 했다.
항복 후 청나라는 여러 차례 파병을 요구했다. 많은 가난한 장졸들은 잦은 차출과 스스로 군량과 군마비를 마련해야 했기에 집안이 무너졌다. 인조는 치욕을 대가로 목숨과 왕좌를 지켰지만 백성들은 목숨을 내놓거나 그에 준하는 고통을 겪었다.
이 참혹한 전쟁을 피할 수는 없었을까? 사실 청나라의 조선 침공은 이미 예견돼 있었고, 조선은 명분을 좇느라 끝내 전쟁참화를 겪는, 기막힌 처지에 내몰리고 말았다.
전쟁이 터지기 전 '죽음으로써 문명국의 자존심을 수호하자'고 외쳤던 척화파도, '힘이 달리는 냉엄한 현실을 바로 보자'고 말했던 주화파도 이렇다할 대책을 내놓지 못했다. 많은 신하들이 사자후를 내뱉었지만 대책이라곤 '유사시에는 강화도로 파천한다'는 방도가 전부였다. 그 와중에 '진정 싸우려 한다면 압록강변에서 결전하여 승부를 내자'는 안도 나왔지만 무시됐다. 국경 부근에서 싸운다면 피해를 줄일 수 있고, 패하더라도 훨씬 완화된 조건으로 강화를 맺을 수 있다는 의견이었다. 하지만 '강화도 신드롬'에 빠져 있던 인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인조는 청군이 한성으로 육박해오자 강화도로 도망치다가 청군에 길이 막혀 급히 남한산성으로 도망쳤다.)
조선의 위정자들은 '명분과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총론은 있었으나 '무엇으로 어떻게 지킬 것인지' 각론이 없었다. ('총론'은 중요하지만 충실한 '각론'이 없다면 별 의미 없는 구호에 그치는 법이다.) 조선이 총론은 있되 각론이 없어서 무너진 것은 병자호란뿐만이 아니다. 임진왜란, 갑신정변 실패, 병인양요·신미양요 등을 겪으면서 조선이 보여준 태도는 각론의 부재를 처절하리만큼 분명하게 증명한다.
이 책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원인과 결과를 분석하는 수준을 넘어서 한·중·일을 아우르는 대외 관계사의 관점에서 양란을 바라보고 있다. 정묘호란과 조선·후금의 관계, 정묘화약의 균열과 병자호란 발생 과정, 병자호란과 조-청 관계, 정묘호란과 조-일 관계의 추이, 병자호란 무렵 조선의 대일정책과 인식, 병자호란 직후 대청 인식의 변화, 조선인 포로 문제, 병자호란 이후 조선의 대청 순치(馴致)과정 등을 상세하게 아우르고 있다.
582쪽, 3만5천원.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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