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창]막장 드라마

입력 2009-05-11 06:00:00

'막장'이라는 단어가 요즘 유행하고 있다. 원래는 탄광에서 뚫고 들어가는 굴의 마지막 부분을 일컫는 말로, 시중에서는 '갈 데까지 갔다'는 의미로 쓰인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말을 여러 가지 단어와 붙여서 쓰기도 하는데 그 중에 '막장 드라마'라는 것이 있다. 말 그대로 내용이 '갈 데까지 간' 반인륜적이고 현실에서 있어서는 안 될 이야기들이라고 한다. 막장이건 말건 이런 드라마들이 오히려 인기는 엄청나다는데, 내 생활이 드라마를 느긋이 볼 수 있는 여유를 누릴 수 없다 보니 신문에 실리는 기사들로 그 내용을 짐작할 뿐이다.

그런 드라마들 중 얼마 전에 유독 관심을 끄는 것이 있었고, 사실은 불쾌하기까지 했다. 신문에서 읽은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겁탈한 여자와 결혼한 남편이 아내의 친구와 공모해 아내를 살해하려 했는데 어찌어찌하여 살아난 아내는 남편조차 몰라보게 변신을 하여 남편과 악녀인 자기 친구에게 복수를 한다. 이 드라마도 무척 시청률이 높았다는데 어차피 이런 이야기들은 수천년 전부터 '권선징악'(勸善懲惡)의 기본 틀로 결말이 나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내가 주목한 부분은 악을 징벌하는 부분에서 악녀가 결국은 천벌을 받아서 위암에 걸린다는 대목이었다.

항상 위암과 마주하고, 위암과 싸우고, 위암 환자들을 대하는 나로서는 너무 당황스러웠다. 표현이야 작가의 자유라지만 과연 위암이 나쁜 사람이 받는 천벌인가? 우리나라 사람 셋 중 한명은 살아가는 동안 암에 걸리고 그 중 제일 많은 것이 위암이다. 그것이 천벌이라면 그 많은 환자는 모두 나쁜 사람이 되는 셈이다. 그러니 기본 명제부터가 거북하지만 그건 잠시 접어두고 다음으로 넘어가 보자.

일단 천벌(天罰)이나 천형(天刑)은 해결 방법이나 도리가 전혀 없어야 한다. 그런데 위암은 1기나 2기에 발견하여 수술하면 거의 80~90% 이상 완치되고, 말기라 하더라도 완치가 되는 수가 종종 있다. 그렇다면 나는 하늘이 내린 형벌도 풀어버리는 대단한 사람이 되니 오히려 막장 드라마에 감사해야 할 노릇이다.

물론 암에 걸린다는 것은 어떻든 분명히 불행한 일이고 나의 주장에도 무리가 많다는 것을 안다. 그러잖아도 사람들은 암에 걸리면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나' 하고 절망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암도 살아가면서 마주치는, 세 사람 중에 하나가 걸리는 흔한 질병이며, 더구나 나을 수 있는 병'이라고 희망을 드린다. 그러니 영화라면 몰라도 제발 가족이 모여서 보는 드라마에서만큼은 국민적 질병이기도 한 위암을 굳이 '형벌'처럼 설정하지 말았으면, 그래서 지금도 위암으로 투병 중인 많은 분들께 희망 대신에 절망을 드리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 나의 간절한 바람이다.

혹시라도 집에서 드라마를 같이 본 아이들이 위암에 걸린 가족이나 친지가 나쁜 짓으로 벌을 받았다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낭패인가?

정호영 경북대병원 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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