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지키기·이웃 돌보기 왜 하나고요?" 하양감리교회 조원경 목사

입력 2009-05-09 06:00:00

▲ 조 목사는
▲ 조 목사는 '더불어 베푸는 삶'이 기독교의 근본정신 중 하나라고 말했다.
▲ 조 목사는 무학산 자락으로 옮긴 옛 상엿집을 두고,
▲ 조 목사는 무학산 자락으로 옮긴 옛 상엿집을 두고, '사라져가고 있는 전통문화유산'에 대한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경산시 하양읍 도리. 읍내 시장을 지나 다리를 건너 무학산을 바라보며 좁은 길로 들어섰다. 화단으로 꾸며진 자그마한 건물. '하양 감리교회'란 색 바랜 팻말이 눈에 들어왔다. 예배당 뒤편 마당으로 들어서자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들려왔다. 까르르 웃으며 뛰놀고, 책을 펴놓고 큰 목소리로 읽고, 그림을 그리는 아이들. 마냥 신났다. 놀이방처럼 보이는 조그만 방은 '하양지역 아동센터'라고 했다. 그 옆으로는 '국수방'이라고 적힌 방이 딸려 있었다.

"도대체 뭐 하는 곳이지?"

교회인지, 식당인지, 놀이방인지 헷갈렸다. 달동네를 연상케 하는 외진 골목에 들어선 교회에는 그렇게 아이들 놀이방, 노인들에게 국수를 나눠주는 국수방이 함께 어우러졌다. 그랬다. 자그만 공동체였다.

조원경(53) 목사는 아이들과 노인들과 교인들을 함께 엮어주는 '더불어 사는 터'를 지키고 있었다. 조 목사는 24년째 이 터를 가꾸고 있다. 짧은 머리에 고무신을 신은 조 목사는 수더분한 옆집 아저씨였다. 너털웃음에는 더불어 사는 여유와 아름다움이 배어 있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인 조 목사는 '우리 것에 대한 애착'과 '더불어 사는 삶'에 자족하고 있었다. 특히 '우리 것'이란 화두에 끊임없이 천착했다.

그는 잊히고, 사라지는 우리 문화와 역사에 몰두했다. 그의 집에는 조선시대부터 구한말, 일제강점시대,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쳐 온 한국 근대사의 기록들이 빼곡히 쌓여있다. 조선시대의 각종 일기, 구한말 필사본, 독립운동가 문필집 등을 수집하고 있었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그는 다시 동양학과 한국근대사에 관심을 쏟고 있다. 10년째 한학을 공부하고 있는 그는 습득한 지식을 바탕으로 다시 수집한 근대사 자료들을 분석하고 있다. 주자서, 퇴계집, 다산 정약용 문헌 등을 항상 끼고 다닌다.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은 지난 2월 영천시 화북면 지천리에 있던 대규모 상엿집을 경산시 하양읍 대학리 무학산 자락으로 이전, 복원하는 데까지 미쳤다. 조 목사는 "상엿집은 세상과의 마지막 이별 인사를 하는 곳으로, 유교적 의미의 전통문화 유산"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지난 2007년 3월 황영례 영천교육청 장학사 등과 함께 (사)국학연구소 대구경북지부를 만들어, 고문을 맡고 있다. 국혼을 살리기 위해 애쓴 영남지역 선열들의 삶을 조명하고 연구하는 데 열정을 바치고 있는 것.

'더불어 사는 삶'도 실천하고 있다.

교회 문을 연 지 3년 되던 해부터 지금까지 무료 법률 및 노동상담, 책읽기와 영어교육 등을 위한 '사랑의 집'을 운영하고 있다. '국수 함께 나누기'는 5년째 이웃의 호응을 얻고 있다. 매주 목요일 낮 '국수방'에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국수를 나눠 먹으며 서로의 삶을 얘기하고 있다. 요즘은 동네 노인 70여명이 주로 모여든다. 여기엔 조 목사의 아내와 교인, 자원봉사자 등 7명이 뒷받침을 하고 있다. 조 목사는 "교인들도 그렇지만, 자원봉사자 아주머니 세분은 3년째 한 주도 빠지지 않고 봉사활동을 펴고 있다"고 말했다.

'지역아동센터'는 4년 전부터 운영되는 아이들 터전. 동네 초등학생 40명을 포함해 휴일엔 60~70명의 놀이터가 된다. 특히 편부 또는 편모 슬하의 아이들에겐 이 센터가 가정이나 다름없다. 사회복지사 2명과 자원봉사 대학생 15명이 사랑을 베풀고 있다. 조 목사는 "국수방과 아동센터가 잘 운영되는 것은 모두 이들 봉사자들의 덕택"이라고 했다.

그는 더불어 사는 삶의 실천을 모두 '좋은 분들 덕분'으로 돌렸다. '좋은 분들을 만난 것이 가장 큰 복'이라는 조 목사의 삶의 얘기를 들었다.

◆묻힌 역사와 문화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은 왜 생겼나요?

"민족의 혼과 얼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양철학과 유교문화, 다시 한국 근대사에 눈길을 돌리게 됐죠. 조선을 거쳐 일제강점시대와 해방 전후사에 관심을 갖다 보니 묻힌 인물이나 유산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기록을 담은 종이 한장이라도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봅니다"

-묻힌 인물이나 유산은.

"독립운동을 벌인 선인들 가운데 상당수 집안이 몰락했습니다. 특히 그 후손들이 해방 전후를 통해 좌익이나 빨치산에 몸담았을 경우 집안의 독립운동 내력은 묻히거나 제대로 조명되지 않더군요."

-예를 들자면?

"청도 운문면 윤영섭, 대종교 활동과 독립운동을 벌인 성주 초전면 성세영, 의성 비안면의 혜약 김광진 등 많은 분들이 제대로 조명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 분들의 활동은 기록이 제대로 발굴되지 않았거나 그 집안이 빨치산 활동 또는 한국전쟁 당시 부득이한 부역 등에 연루됐다는 이유로 묻혀 있습니다."

◆소중한 문화유산

-주로 어떤 자료를 모으고 있습니까.

"조선시대 일기, 구한말과 해방 전후 미발간 필사본 등이 주 관심사입니다. 일기, 상소문, 추모글, 일제강점시대 재산관리대장 등이지요. 1600년대 말부터 1700년대 초 울릉도, 독도와 관련해 조정에서 벌어진 논쟁을 다룬 필사본도 있지요."

-민족 혼을 되찾기 위한 활동은.

"구한말이나 일제강점시대 나라를 위해 활동한 인물들에 대한 자료를 모으고 있습니다. 또 국학연구소를 통해 근현대사 강의, 토론, 자료조사와 연구 등을 벌이고 있습니다."

-무학산 자락에 상엿집을 옮겨놓았는데.

"유교든 불교든 소중한 전통 문화양식과 유물이 사라지고 있는 게 안타깝습니다. 전통 상여와 상엿집도 사라지고 있는 유산의 하나입니다. 선조들의 장례문화와 의식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유산으로, 복원과 보존의 필요를 느꼈습니다."

◆독립운동가 후손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했다는데.

"조부는 1919년 청송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일제에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서 수형생활을 했습니다. 3년형을 선고받고 1년 7개월간 복역했지요. 그로 인해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습니다. 3남 3녀 중 큰고모가 남의집살이로 간 것을 비롯해 모두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며 곤궁한 생활을 했지요. 1967년에야 조부의 독립운동 내력이 조명돼 청송 안덕면에 '해창 조병국 의사 기념비'가 세워졌습니다."

-원래 기독교 집안이었습니까.

"아닙니다. 한학을 공부했던 조부는 수형생활 중 독립운동을 벌인 기독교인들과 접하면서 관심을 갖게 됐지요. 출감 뒤 1936년 조부가 부친의 성인식을 유교와 기독교를 결합해 치른 것도 그 단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당시 성인식은 동네사람들을 모아놓고 사당 등에서 절을 하지만, 조부는 유교적 관례를 한문으로 작성한 뒤 배례는 교회 예배당에서 올렸지요. 장남인 부친은 조부의 영향으로 야간 신학공부를 한 뒤 교회를 세웠습니다."

◆기독교로의 입문

-부친의 영향으로 목사가 됐나요?

"대학 때는 철학을 전공하고, 부전공으로 독문학을 했습니다. 지역 대학에서 신학을 강의하던 영국 셰필드대 한국학 과장인 제임스 헌틀리 그레이슨(65) 교수를 만난 것이 인연이 됐습니다. 그레이슨 교수는 한국 아이 2명을 입양하고, 김정현이란 이름을 가질 정도로 한국에 관심이 많았지요. 학부 졸업 당시 공부를 더 하고 싶었지만, 집안형편 때문에 부모가 취직을 권했지요. 이런 차에 그레이슨 교수가 학비와 유학 등을 책임지겠다며 대학원 신학공부를 권유했지요. 그레이슨 교수 덕분에 신학 석사, 박사학위는 물론 영국, 미국 유학도 가능했습니다."

-경산의 자그마한 교회에 자리 잡은 계기는.

"개척교회였습니다. 하양에서도 교인이 많이 모일 수 있는 읍내 중심지나 시장이 아닌 낙후된 지역을 택했습니다. 1986년 이곳에 처음 교회를 세운 뒤 '더불어 함께하는 삶'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사는 삶

-'국수 함께 나누기'는 어떤 의도인가요?

"'더불어 사는 것'은 기독교의 근본정신입니다. 매주 한 차례 동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국수를 대접하며 공동체 문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이는 봉사자들의 꾸준한 열정 덕택입니다. 자신의 희생을 통해 봉사하는 정말 고맙고 아름다운 분들입니다. 이 분들 때문에 5년 동안 이어올 수 있었습니다."

-'사랑의 집'과 '지역아동센터'는 어떤 역할을 합니까.

"소외된 이웃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그마한 공간을 마련해 무료 법률상담이나 노동상담을 벌였지요. 대학생 자원봉사자들이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영어도 가르쳤지요. 이도 전적으로 관련된 분들의 자원봉사 덕분입니다.

지역아동센터는 사회복지사와 자원봉사 대학생들이 주도적으로 끌고 갑니다. 40여명의 지역 초등학생들이 참여하고 있는데 이 중 21명은 편부 또는 편모 슬하의 아이들입니다. 이들에겐 이 센터가 가정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공부도 배우고, 놀고, 먹고, 생활합니다. 휴일이면 야외로 나가 갯벌체험, 자연탐사, 문화기행 등을 하지요. 아쉬운 것은 초교 졸업 뒤엔 떠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소중한 실천인데요?

"아버지가 자녀를 돌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목사니까 당연히 하는 일 아니겠습니까. 부끄럽습니다."

김병구기자 kb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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