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욱의 달구벌이야기](14)대구향교

입력 2009-04-23 14:04:32

지역유림의 독립운동 본거지

▲대구향교
▲대구향교

대구 중구 남산동에 대구향교가 있다. 대구향교는 조선 태조7년(서기 1398년) 교동시장과 태평로 일원에 창건되었다. 교동(校洞)이란 이름도 향교가 있었다는 데 연유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그러나 192년간 교동에 있던 향교는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고, 조선 선조32년(서기 1599년) 당시 경상도관찰사 한준겸이 유림과 뜻을 같이해 달성토성에 복원했다. 그 뒤 달성공원의 터가 좋지 않다고 해서 서기 1605년 옛터인 교동으로 다시 옮겼는데, 그 위치는 옛 중앙극장 동쪽 일대였다.

대구향교는 지역 유림들의 독립운동 본거지로 이용되었다. 그러자 일제는 1932년 도시계획을 이유로 당시로서는 변두리였던 지금의 자리로 강제 이전하였다. 대구향교에는 대성전'명륜당'동서재'낙육재'유림회관 등의 건물이 있다. 그 가운데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는 대성전은 1982년 대구문화재 자료 제1호로 지정되었다.

대구향교는 지역의 근대 교육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의 개념으로 보면 향교는 국립학교에, 서원은 사립학교에 해당된다. 1909~1916년 사립 협성학교가 공자묘 부속의 대강당을 교사로 사용하였으며, 그 뒤 대구고등보통학교로 통합되었다. 또한 1910년 대구공립 농림학교가 향교 시설을 빌려 개교했고, 1920년대에 들어 지금의 태평아파트 일원에 대성학원과 대구학원을 개설함으로써 근대 교육의 산실이 되었다.

대구향교는 유교정신만 고집하는 곳이 아니다. 전통적인 인성교육이 사라지면서 청소년들의 비행이 늘어나는 세태를 감안, 청소년 교육에 열의를 쏟고 있다. 충효교실을 열어 명심보감과 사자소학은 물론 전통예절을 비롯한 인성교육 프로그램을 계발, 운용하고 있다. 이와 함께 현대 감각에 맞춰 전통 문화와 혼례를 주선하는 등 정신문화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봉산동 화랑골목은 연귀산 자락의 동쪽을 흐르던 대구천을 복개하여 만든 길이다. 1992년 이곳을'봉산문화거리'로 지정하였다. 그 배경에는 화가 이인성을 기린다는 뜻이 있다.

1940년대 향토 미술의 선구자였던 그가 작품활동을 하던 곳이라는 데 의미를 부여하였다. 봉산문화거리로 지정되고 난 뒤부터 해마다'봉산미술제'가 열리고, 2004년에는 봉산문화회관이 들어섰다. 그러나 20여개의 화랑과 고미술품점, 그리고 표구점들이 중심이 돼 행사를 이끌어 가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 규모나 내용에 있어서 빈약하기 그지없다. 미술 전시회 말고는 보고 즐길 만한 문화행사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다 2006년에는 주거환경개선사업으로 대형 아파트가 들어섰고, 그로 해서 하루에 1천여대의 차량이 분주하게 드나들고 있다. 그래서'마음놓고 거닐면서 문화예술품을 보고 감상할 수 있는 곳'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해버렸다. 그 동안 정책적인 배려와 지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한 '문화의 거리'가 돼 버려 안타깝기 그지없다.

시대는 진화한다. 지금은 일제시대도 아니오, 민족상잔의 전쟁시대도 아니다. 세대도 진화한다. 오늘의 주류 세대는 보릿고개에 배고파 허덕이던 세대가 아니다. 그 어느 세대보다도 다양한 교육을 받았고, 문화적으로도 세련되었다. 그들은 문화를 음미하고 즐김으로써 삶의 질을 높이고 싶어한다. 이처럼 문화에 허기진 사람들을 감싸줄 수 있는 방안이 모색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 밖에도 숱한 흔적들이 있다. 반월당 네거리 남쪽 언덕바지에'민주화 기념관'이 있다. 일제시대 증권회사로 사용하던 건물로 지역의 야당 원로들이 성금을 모아 매입했다. 한때 신민당 당사로 쓰다가 지금은 민주화 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김종욱(문화사랑방 허허재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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