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본 영화중에 가장 아름다운 영화가 독일 영화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이다. '파니 핑크'의 여성 감독 도리스 되리의 2008년 작으로 국내에서는 예술전용관을 중심으로 반짝 상영한 작품이라 못 본 분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벚꽃이 흐드러진 이번 주에 소개하지 않을 수 없는 작품이다. 아름다운 벚꽃의 영상과 그 속에 흐르는 정서의 향기가 말도 못할 정도로 진하기 때문이다. DVD로 출시되거나, 혹 TV에 방영될 때 놓치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코너에 소개한다.
어느 시인은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이란 제목을 듣더니 "애들?"이라고 했다. 평생을 함께 사랑한 후에 남겨진 것들이 어디 자식들뿐이랴. 그러나 이 제목은 한국에서 개봉하면서 임의로 붙여진 제목이다. 원제는 'Kirschbluten - Hanami'이다. 우리말로는 '벚꽃'(Cherry Blossom)이다. 여기에 '꽃 구경'이란 뜻의 일어 '하나미'(花見)가 부제로 붙었다.
벚꽃은 짧게 피었다가 어느 날 눈처럼 일제히 떨어져 버리는 꽃이다. 참으로 덧없고, 표일(飄逸)한 꽃이다. 삶과 죽음도 그런 것 아닐까.
독일의 한적한 시골에 살고 있는 노부부가 있다. 아내 트루디(한넬로어 엘스너)는 의사에게서 남편 루디(엘마 베퍼)가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는 얘기를 듣는다. 차마 남편에게 알릴 수 없었던 아내는 베를린에 있는 자식들을 찾아가자고 한다. 그러나 여행길에서 남편이 아닌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나는 일이 벌어진다. 평생 아내의 손길 속에 살던 남편 루디. 그는 아내의 옷과 소지품을 챙겨 그녀가 평소 꿈꾸던 일본으로 향한다.
영화 속 아내는 막내 아들 칼이 있는 일본을 선망한다. 늘 여행을 떠나고 싶어 하고, 새로운 것에 대한 관심도 대단하다. 반면 남편은 전형적인 독일 남성으로 한 치의 빈틈도 없는 계획적인 일상에 도전과 모험도 싫어한다. 후지산을 가보고 싶어하는 아내에게 "여기도 전부 산인데, 뭘!"이라고 대꾸한다.
둘의 판이한 성격을 잘 드러내는 것이 일본 현대 무용 부토다. 아내는 부토에 매료돼 직접 춤을 배우기도 한다. 부토는 '무도'(舞蹈)의 일본식 발음이다. 부토는 일본 전통 예술인 가부키와 서구의 현대 무용이 만나 탄생한 아방가르드 무용의 한 장르다. 고전적인 가부키와 달리 형식이 자유롭다. 발가벗거나, 머리도 박박 깎아 전위적인 느낌을 주는 춤이다. 그러나 그 정서는 일관적으로 슬픔과 절망, 상실을 담고 있다. 2차 대전에서 일본의 패망 후 허무주의를 춤으로 그려낸 것이다. 1959년 히쓰카다 다쓰미가 창시했으며, 1960년대부터 '부토'라는 용어로 불리기 시작해 1970, 80년대 유럽에서 큰 인기를 누렸다. 특히 패전의 아픔을 함께 나눈 독일에서의 인기는 대단했다.
아내는 베를린에 온 부토의 대가 다다시 엔도의 무용 공연을 보러 간다. 흰색 칠을 한 맨몸의 엔도는 무대에 뿌려진 물에 미끄러져 일어서다 넘어지고, 일어서다 넘어지기를 반복한다. 살려고 몸부림치는 인간의 처절한 모습이다. "그의 천국은 영원하지만, 그 보상인 삶은 하루뿐"인 하루살이와 다를 바 뭐 있을까. 남편의 죽음을 떠올렸을까. 아내는 눈물을 흘린다.
그런 아내가 떠났다. "내게 남은 그녀의 기억은 내가 죽으면 어디로 갈까?" 그는 처음으로 낯선 땅 일본으로 온다. 눈송이를 머리에 인 듯한 꽃길, 하얗게 핀 벚꽃 아래에서 코트를 풀어 젖힌다. 그 속에 아내가 좋아하는 치마와 스웨터를 입고 있다. "자, 봐! 당신의 꽃이야!" 아내에 대한 그리움과 애정이 절절하게 묻어나는 장면이다.
아내가 가고 싶어했던 도쿄를 아내의 옷을 입고 한없이 걷는 남편은 그동안 잘해 주지 못한 회한으로 눈물을 흘린다. 그러다 벚꽃이 흐드러진 공원에서 부토 춤을 추는 소녀 유(이리즈키 아야)를 만난다. 유도 1년 전 떠난 엄마를 못 잊어 평소 엄마가 즐겨 쓰던 분홍색 전화기를 들고 춤을 추고 있다. 그녀를 통해 애도의 춤을 배운다. 아내를 떠나보내는 한풀이, 씻김굿. 유와 함께 후지산을 찾아간다.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은 일본에 대한 도리스 되리의 애정이 한껏 묻어나는 영화다. 도쿄행 여행도 일본의 거장 오즈 야스지로의 '동경 이야기'를 보고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벚꽃과 하루살이를 통해 덧없는 삶을 은유하기도 하고, 파리로 서로 다른 문화를 얘기하는 등 상징과 은유가 가득한 영화다.
죽음과 삶, 상실과 기억이란 다소 무거운 주제를 담고 있지만, 물 흐르듯 편안하게 영화를 볼 수 있도록 배려하는 감독의 재능이 도드라진다.
"늘 일본에 가보고 싶었다. 후지산과 벚꽃을 그와 함께 꼭 한번 보고 싶었다. 남편 없이 구경하는 건 상상할 수가 없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흐르는 아내의 대사다. 몸은 떠났지만, 그녀는 도쿄의 거리를 걷고, 벚꽃을 보고, 후지산 아래에서 그렇게 좋아했던 부토춤을 함께 추었다. 또 하나의 반쪽, 남편을 통해서다.
'앉았다 떠난 아름다운 그 자리에 여운 남아, 뉘도 모를 한때를 아쉽게도 한들거리나니 꽃가지 그늘에서 그늘로 이어진 끝없이 작은 길이여'라고 어느 시인은 봄 꽃길을 노래했다. 매년 보는 꽃이지만 이맘때만 되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것은 꽃이 피기 때문이 아니라, 지기 때문이 아닐까. 아름다운 꽃길은 아름다운 사람의 길이기도 하다.
김중기 객원기자 filmto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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