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 노블(Graphic Novel)
우리에겐 다소 생소한 용어다. 직역하면 그림 소설이다. 그림으로 그려졌지만 소설 수준의 분량을 가지고, 구성 또한 소설과 유사한 작품을 말한다. 그렇더라도 그림에 말을 집어넣은 만화가 아닌가.
만화가 고전적이며 문학적인 '소설'의 명찰을 단 것은 대단한 찬사다. 그림의 평면성을 벗어나, 그 속에 소설적인 은유와 3차원적인 상상력을 덧댄, 그래서 일반적인 만화와 구별하고, 또 작가정신을 높이 사기 위해 붙여진 말이다.
그래픽 노블의 대가 중 한 사람이 프랭크 밀러(53)다. 근육질 스파르타 300인의 정예군이 페르시아에 맞서 최후의 결전을 벌이는 '300'(2007년)과 도시의 음울한 폭력성과 비장미를 그린 '신시티'(2005년)의 저자다. 그의 작품은 미국의 서점에서는 만화 코너에 있지 않고, 소설 장르 옆 별도의 그래픽노블 코너에 꽂혀 있다.
'신시티'는 영화라고 부르기엔 너무나 만화적인 표현 기법을 쓰고 있다. 기존의 만화들이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모두 영화의 틀 속에 흡수됐지만, '신시티'는 오히려 영화가 만화 속에 빠진 꼴이다. 만화처럼 흑백이고, 프레임 속 장면들도 모두 만화의 미장센을 그대로 쓰고 있다.
1991년부터 출간된 '신시티'는 전 세계 젊은이들을 열광시켰다. 위태로운 수준의 폭력 신과 섹스 신이 난무하는 하드보일드 만화였다. 섬세한 터치에 많은 여백, 심도 있는 대사는 수많은 컬트 팬을 양산했다. 많은 팬들이 영화로 만들어지기를 꿈꾸었지만, 그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프랭크 밀러가 할리우드와 담을 쌓았기 때문이다. 그는 한때 영화에 참여하기도 했다. '로보캅 2'와 '로보캅 3'의 각본을 썼다. 그러나 두 작품은 그의 명성에 치명타를 날렸다. 그의 비장미는 온데간데없고, 로보캅의 황당무계한 활약상만 나열된 전형적인 오락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스토리를 제멋대로 변형시키는 할리우드 제작 시스템에 염증을 느끼고 어떤 스토리도 제공하지 않겠다고 단언했다. 그러나 할리우드의 악동으로 불리는 괴짜 감독 로버트 로드리게스('황혼에서 새벽까지' 감독)가 한 편의 데모 영상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신시티'의 한 에피소드를 단편으로 만든 것이다. 그것은 영화의 몰골을 하고 있었지만, 자신의 작품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구현한 영상이었다. 불가능해 보였던 만화적 프레임이 생명력을 얻어 영사되고 있었다.
여기에 감명 받은 그는 쿠엔틴 타란티노('펄프 픽션'의 감독)와 함께 공동감독으로 참여하게 된다. '신시티'는 영화의 표현력을 한층 높였으며, 만화 또한 온전한 형태로 영상으로 재현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모두 녹색 스크린이 내려쳐진 세트에서 촬영돼 그래픽과 합성됐다. 안경이나 반창고 등을 흰색으로 칠하거나, 또는 야광으로 붙여 만화적 느낌의 영상을 인공적으로 만들어냈다.
영화를 찍기 위해 미리 그림으로 장면을 그리는 것이 스토리보드다. 그러나 '신시티'는 밀러의 원작이 바로 스토리보드였다.
프랭크 밀러의 그림은 파워풀하다. 특히 그 속에 담겨진 대사는 필름 누아르(폭력 영화)의 정수를 보여준다. 비장미는 권총의 질감처럼 튼실하고, 삶과 죽음의 무게도 핏빛처럼 진득하다. 그의 독창적인 해석과 작가주의는 원작에 대한 치밀한 구성과 연구가 뒷받침된 것이다.
예를 들면 '300'에 나오는 스파르타 병사의 복장에서도 엿볼 수 있다. 통상 영화와 만화에서는 병사들이 치마를 입고 나온다. 그러나 '300'에서는 팬티 외에는 완전히 노출된 근육질의 강철 전사들이다. 만일 이들이 치마를 입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밀러는 '300'을 구상하면서 그리스 여행을 떠나 많은 자료를 뒤져 보았다. 그런데 어디에서도 그들이 치마를 입었다는 명확한 근거를 찾을 수가 없었다. 많은 석상에서도 그들은 맨몸이었다. 헤라클레스의 동상도 마찬가지였다. 헤라클레스의 후손이라고 믿고 있던 스파르타 전사들이 헤라클레스의 패션을 따르지 않았을까. 그는 망토로 중요 부위를 가리는 것으로 처리하고 작품을 그렸다. 그래서 야수성과 원시성을 더한 단말마 같은 수사자들의 포효를 더욱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었다.
또 하나는 레오니다스왕의 아내인 왕비 고르고의 묘사다. 그는 남편이 떠난 후 정적과 잠자리를 갖는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스파르타에서는 남자는 전사로 길러지고, 여자는 또 다른 전사(?)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당시로서는 충분히 이해될 수 있었던 행위였다.
독창적인 연구 없이는 새로운 창을 열 수 없는 법이다. 필름 누아르 풍 만화의 창시자이자 그래픽 노블의 대가 프랭크 밀러는 진부한 틀에 갇힌 만화에 소설적 힘을 불어넣은 통찰력 깊은 작가였다.
김중기 객원기자 filmto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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