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처럼 살다 간 그녀…김점선 화백을 보내며

입력 2009-04-03 06:00:00

지난달 22일 서울로 가던 KTX 객차 안. 뉴스 자막을 통해 '화가 김점선 별세, 향년 63세'를 접했다. 숨이 멈춰 한일(一)자를 긋는 병원의 맥박 표시기같이, 자막은 신속하지만 무미건조하게 화면을 통과했다.

지난해 8월, 김점선 화백을 만났다. 동화 같은 그림과 스타카토처럼 짧고 경쾌한 문장에 사로잡혀 그녀가 쓴 모든 글을 읽고 나서였다. 사로잡혔다. 무조건 만나보고 싶었다. 수소문을 한 뒤 이메일을 보냈고 답장이 왔다.

'매주 맞는 항암 주사도 이번 주는 건너뛰는 행운의 주기입니다. 그러니 금욜 밤부터 일욜 아침까지 아무 시간이나 쓰십셔. 만일 내 친구들과 노는 시간과 인터뷰 시간이 겹치면 나는 내 친구들과 놀면서 가끔씩 질문에 대답하겠습니다.' 거침없는 글처럼 답장도 그녀다웠다.

화가이자 작가, 이제는 동화작가로까지 변신했던 고 김점선. 그림과 관계없는 이화여대 한 학과를 나와 번역일로 소일했던 스물다섯 어느 날, '죽도록 그림이나 그리다 죽자'며 엉뚱하게 미술학원에 등록했다. 1년간 미친 듯이 그렸고, 이듬해 거짓말같이 홍익대 미술대학원에 입학했다. 그해 파리 비엔날레 한국 대표로 뽑혔다. 괴짜였고 천재였던 것이다. "그림이 뭐같이 비싼 거? 그게 다 있는 체하는 고귀하신 양반들이 만들어 놓은 거야. 하나밖에 없는 것같이 보면 좋잖아. 꼭꼭 숨겨놓고 보면 좋나? 나는 작품 안 팔어 이제. 내 그림 좋으면 컴퓨터에서 컬러 프린터로 뽑아서 집에 붙여놔. 흐흐."

미술품의 값어치에 대해 묻자 거침없이 대답하던 그녀는 몇 해 전 오십견이 찾아와 붓을 들지 못하자 컴퓨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누구나 작품을 볼 수 있도록 했다. 팔지 않았다. 서울의 한 아파트 그녀의 집은 오로지 그림과 화초뿐이었다. 먼지가 뽀얗게 쌓인 작품들이 방, 거실, 통로에 가득 쌓여 있었다. 그러다 난소암으로 투병 생활을 시작했다. 해가 뜨면 잠에서 깨어나 그렸고 해가 지면 방에서 잠을 잤다. 자연빛이 아니라며 형광등은 켜지 않았다.

당시 "몸이 많이 나아서 이제 붓을 들었다"며 유화를 그리고 있었다. 여름이었지만 털신을 신었고, 자꾸 빠지는 머리카락은 신경 쓰지 않는다고 웃었다.

"이 세상에서 뭐가 가장 무서운지 아나? 아이들이다. 내가 뭐라고 해도 그걸 다 믿어버리는 아가야들이 가장 무섭다. 그 동그랗고 순진하고 영롱한 순수가 가장 무섭다."

그녀는 '교육'을 아주 중요시했다. 그래서 입원 중이던 병원에서 '동화책을 내자'는 제의를 받고 흔쾌히 받아들였다. "동화책은 100권이 목표"라고 했다. 그때까지 살고 싶었으리라. 약속을 지키고 싶었으리라.

그녀의 마지막 유작이자 자서전 '점선뎐'을 샀다. 이런 글이 있었다. '암은 스스로 돋아난 종유석. 그래서 나는 내 암조차도 사랑한다. 내 삶의 궤적이다. 피곤할 때 풀지 않은 피로가 쌓인 석회석이고, 굶고 또 굶으면서 손상된 내 내장 속에 천천히 새겨진 암벽화다.' 그녀는 용감무쌍했고 아름다웠다. 김 화백은 경기도 파주 탄현의 기독교 공원에 묻혔다. 그녀가 잊혀져 갈 즈음 꽃 한 송이 들고 찾아갈 것이다. 그녀의 글 한 구절을 읊어주리라. '무궁화꽃은 촌여자처럼 아름답다. 제 할 일 다하면서 바쁘게 살다가 얼핏 모양낸, 그런 여자처럼 쬐금만 아름다운 꽃이다.' 김점선은 무궁화꽃이다. 하늘에서 만개하길.

서상현기자 subo801@msnet.co.kr 사진·장기훈 프리랜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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