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3년 영남유림들이 퇴계 이황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했던 호계서원(虎溪書院·경북도 유형문화재 35호)의 좌배향(左配享)을 둘러싸고 서애 류성룡과 학봉 김성일 문중 간에 빚어졌던 '병호시비'(屛虎是非)가 400여년 만에 일단락됐다.
최근 서애 종가의 류영하 종손과 학봉 종가의 김종길 종손이 만나 퇴계 위패를 중심으로 서애 위패를 좌배향, 학봉 위패를 우배향하는 봉안방식에 합의하면서 호계서원 복원사업이 탄력을 받게 됐다.
호계서원 중건추진위원회(이석희 호계서원 원장)는 양 문중 간 위패 봉안방식 합의에 따라 최근 서원을 복원키로 하고 사당과 서재·누각·사주문 등 건립 비용 12억8천만원을 안동시에 요청해 놓고 있다. 안동시는 내용을 검토해 오는 7월쯤 경북도 사업승인 신청 등 중건을 추진할 계획이다.
영남 3대 시비 중 하나로 알려진 '병호시비'는 퇴계 제자들이 호계서원을 세우고 퇴계 위패를 봉안하면서 두번째 서열인 왼쪽 위패를 누구의 것으로 하느냐의 문제를 두고 벌어졌던 시비를 일컫는다.
당시 영의정 다음에 좌의정·우의정 순으로 된 관직서열에 따라 좌배향을 두고 학봉 문중은 나이에 따라, 서애 문중은 관직에 따라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 학봉은 서애보다 4세 연상이고 퇴계 문하에 먼저 들어간 입제자였으나 벼슬은 영의정을 지낸 서애보다 낮은 관찰사에 머물렀다.
안동 유림들의 이 같은 다툼에 상주에 은거했던 영남학파의 장로격인 우복 정경세는 서애를 좌배향해야 한다고 서애 문중의 손을 들어 주었다. 이 가운데 1805년 영남유림에서 한양 문묘에 종사(從祀)케 해달라는 청원을 올리면서 나이순인 학봉, 서애, 한강(정구), 여헌 (장현광) 순으로 상소를 적었으나 서애 문중에서 서열의 잘못을 지적, 상소를 하면서 2차 시비가 빚어졌다. 당시 조정은 두개의 상소를 모두 기각했다.
이 같은 서열시비는 대구유림과 안동유림 간 갈등 과정에서 또 한 차례 마찰을 빚다가 결국 학봉은 임천서원에, 서애는 병산서원에 각각 모시면서 호계서원은 퇴락하게 된 것. 중재자로 나섰던 퇴계 종손 이근필씨는 "모든 일은 가문과 선조들에 대한 자긍심으로 빚어진 것으로 후손들이 서로 손을 잡아 서원이 제모습을 찾을 수 있게 됐다"고 했다. 안동·엄재진기자 2000ji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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