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창]진료실의 봄날

입력 2009-03-30 06:00:00

변덕스러운 날씨가 며칠째 이어지고 있다. 벚꽃이나 개나리가 피기 시작한 것을 보면 분명 봄인데 진료를 하다 보면 너무 덥다. 그러다 갑자기 추워져 출근길에 차 시동을 켜니 히터가 작동한다. 차 안은 겨울이고 신천대로의 풍경은 봄이다. 사람들은 춥다고 하지만 겨울이 끝나고 이미 봄이 온 것을, 또 일시적인 계절의 시샘인 것을 잘 알고 있다. 우리의 살림살이에도 빨리 겨울이 끝나고 따뜻한 봄이 왔으면 좋겠다.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문 밖에 벌써 봄이 찾아왔을지도 모른다.

날씨가 따뜻해지면 종종 병원에 아주 나이가 많은 분들이 치과진료를 받으러 오곤 하는데 개원 후 가장 연세가 많은 분은 치아를 발치하러 온 98세 할머니였다. 그 연세에 아직 뽑을 치아가 남아 있다는 것도 신기했지만 할머니의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모습도 놀라웠다. 연세가 많다 보니 보호자와 발치를 할지 말지를 의논하고 있으니 할머니는 "원장님, 걱정 말고 뽑아주소. 내일 죽을지, 오늘 죽을지 모르는데 당최 아파 못 살겠다"고 한다. 할머니 말을 들으니 뽑긴 뽑아야겠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더욱 주저하게 돼 잠시 '어떻게 해야 하나'하고 고민하고 있으니 할머니는 "내가 나이가 많아 걱정하는 모양인데, 걱정 말고 두 살이라고 생각하고 뽑아 주소" 한다. 백수에서 두 살이 모자라니 자신을 두 살 된 아기라고 생각하고 치료해 달라는 것이다. 치아를 무사히 뽑은 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가는 할머니를 보니 역시 긍정적이고 유머가 있는 사람이 장수하는 것이 확실한 것 같다.

한 번은 몇 년 전 이맘때 노부부가 같이 오셔 할머니 틀니가 오래돼 헐거워져 다시 제작한 적이 있었다. 할머니가 약간 거동이 불편하고 몸이 안 좋다며 진료를 받으러 올 때마다 할아버지가 같이 오셨다. 위쪽 틀니만 만들기로 하고 틀니를 제작하는 과정에 들어갔다. 그런데 틀니가 완성된 뒤 약속일이 지나도 내원하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 후 점심시간에 할아버지만 오셔 남은 치료비용을 내고 할머니 틀니만 찾아 가려 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오셔야 새로 만든 틀니가 잘 맞는지 검사해 볼 수 있어요" 하니 할아버지가 머뭇하면서 "틀니만 주면 안 되느냐"고 하셨다. 그래서 자세히 물어보니 며칠 전에 할머니께서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한다. 장례를 치르고 정신없이 있다가 돌아가신지 15일째 되면 산소에 가서 고인의 유품이나 옷을 태우고 명복을 비는 삼오에 고인의 틀니를 가져가 묻어주려고 오셨다고 한다. 고인이 한 번도 사용 못한 새 틀니를 주려니 이상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할아버지 마음을 이해할 것도 같아 틀니를 조의금과 함께 드렸다. 할아버지가 가신 후 마음이 울적해 진료실 창밖을 바라보니 터벅터벅 걸어가는 할아버지 뒷모습으로 활짝 핀 벚꽃이 아지랑이처럼 겹쳐 보여 머릿속이 멍한 게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는 듯 했다. 그렇게 진료실의 봄날은 가는가 보다.

장성용 민들레치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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