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신문화의 수도이자 천년의 땅 안동은 낙동강이라는 자산도 품고 있었다.
지난해 말 안동에선 낙동강 물길 살리기 기공식이 열렸다. 낙동강 복원의 첫 단추를 안동에서 끼운 것은 그 만큼 안동에서 낙동강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면 낙동강은 안동과 어떻게 호흡해왔을까?
일행은 퇴계 예던길을 시작으로 안동의 낙동강을 찾고자 했다. 퇴계 종택과 이육사 문학관을 지나면 계곡 아래 큰 강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도산 단천교와 가송리 고산 사이 6km의 '퇴계 예던길'이다. 숲과 강, 바위와 소 등이 어우러져 '그림속으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안동인 퇴계에게 강은 높은 학문적 가치를 찾고 사람이 살아가는 이치를 찾는 벗이 됐다. 퇴계의 '요산요수'(樂山樂水) 철학은 자연의 섭리와 이치를 사람이 따를 것을 가르치고 있다. 퇴계는 예던길을 걸으며 경암(景巖)에서 강의 아름다움에 반하고, 한속담(寒粟潭)에서 풍광에 감탄하고, 미천장담(彌川場潭)에서 자연의 이치를 깨달았다. 이렇듯 안동의 낙동강은 한국의 정신문화를 이끌었던 안동 선비들에게조차 자연의 섭리를 가르치고 학문의 가치를 일깨웠다.
퇴계가 반한 낙동강은 서민들의 삶 속에서는 치열한 생존현장이면서 안동을 지탱해온 경제 터전이었다. 한편으론 홍수와 범람 등 엄청난 자연재해의 고통을 안겨주기도 했다.
안동에서 청송방면으로 가다 보면 거대한 댐이 앞을 가로막는다. 바로 임하댐이다. 16년 전인 1993년 영양에서 발원해 청송을 거쳐 안동으로 흐르는 반변천 물길을 높이 73m, 길이 515m의 댐이 가로막은 것이다.
거대한 물단지가 조성되자 숱한 땅들이 물속에 잠기고 사람들이 떠났다. 오랫동안 북부지역의 경제를 지탱했던, 바다와 뭍을 이어 먹을거리를 주고 받았던 역사도 함께 묻혔다.
댐 이전 이곳 낙동강은 안동의 경제였다. 이 곳에는 북부지역 해산물의 유통, 교통의 중심이었던 '챗거리장터'로 유명했다. 영덕 등 바닷가 해산물의 유통거점이 됐다. 우마차꾼들이 줄을 이었고 등금쟁이(등짐장수)와 보부상들이 붐볐다. 장터 인근에는 마방(馬房)이 성행했다.
안동축제관광조직위 권두현 사무처장은 "이 곳 일대는 각종 산물이 풍부하게 생산되고 교통이 발달해 어물과 농산물의 물물교환으로 경제거점지가 됐다"며 "이 곳에서 해산물을 구입한 등짐상들은 북부지역 산골마을을 발로 찾거나 인근지역 5일장에서 유통시키면서 경제를 이끌었다"고 했다.
조선후기 실학자 서유구가 쓴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는 챗거리장터(편항장)는 5일과 10일에 열렸다. 이 곳에서 장을 본 장돌뱅이들은 인근 부내장(안동장), 현내장(풍산장), 옹천장, 구미장, 포저장(봉화) 등을 돌며 당시 서민들의 경제를 이어갔다.
임하댐 바로 곁에 또 하나의 물단지가 있다. 바로 안동댐이다. 지난 1976년에 건설됐다. 이 물단지에도 숱한 땅과 역사, 사람들의 애환이 묻혀 있다. 이 곳 일대에도 임동 챗거리 장터와 서민 경제의 한 축이었던 예안장터가 성황을 이뤘다. 지금은 박물관의 모형으로만 그 영광을 알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
호수의 생성은 '육지어부'(어뱅이)라는 새로운 직업도 만들었다. 안동시 통계연보에는 매년 140여가구 560여명이 어뱅이로 생업을 이어가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일대에 들어선 민물고기 식당들도 줄잡아 200여곳에 이른다. 육지어부와 식당이라는 새로운 경제 주체를 만들어낸 것이다.
낙동강은 안동 땅에 더넓은 땅도 만들어줬다. 물야탄(안동호 상류 천)과 반변천(임하호 상류천)이 안동시내 귀래정앞에서 만나 비로소 강다운 강을 이룬다. 이 강은 남쪽으로 흐르면서 넘치고 흙이 쌓여 풍산·구담 등 기름진 들을 만들었다.
재미있는 것은 수리시설이 자리잡지 못했던 옛날에는 강 하류의 기름진 들보다 낙동강 지류 산골에 자리했던 땅들이 더 큰 경제적 가치를 형성했다. 지류하천의 경우 물길만 막으면 언제라도 논에 물을 댈 수 있어 논농사가 쉬웠다. 이에 비해 하류 논은 물을 끌어댈 수 없어 하늘에 의존해야만 했다.
안동대 민속학과 배영동 교수는 "옛날 세금도 낙동강 지류에 있는 논들이 더 많이 냈다. 풍산들 경우 가뭄이 들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땅이 됐다. 이 때문에 가뭄에 생존력이 강한 피·메밀 등 곡식들이 대체작물로 재배됐던 기록이 있으며 실제 병산서원 향사 등에 피가 사용된 적도 있다"고 전했다.
강은 옥토를 만들어 먹거리를 제공하기도 했지만 홍수 등 자연재해로 살림살이를 앗아가기도 했다. 기록에는 1934년 7월23일 오전 11시 낙동강의 대홍수로 안동시가 휩쓸려 버렸다. 이 때 수차례 중건후 100여년간 위용을 자랑하던 영호루조차 주춧돌과 돌기둥만 남긴 채 쓸려 가버렸다. 이후 산업화 물결과 홍수예방, 수리시설의 중요성으로 댐들이 들어섰다. 농작물 피해로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초래했다.
천년의 땅 안동에서 낙동강이 차지하는 비중은 실로 엄청났다. 안동과 함께한 낙동강은 이제 새로운 낙동강으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정부는 지난해 12월29일 안동 낙동강 둔치에서 '4대 강 살리기사업' 첫 기공식을 가졌다. 지난 19일 경북도청에서 열린 낙동강 지역 세미나에서는 옛날 지역경제와 문화 소통의 장이었던 강의 의미를 되살리자는 의견들이 쏟아져 나왔다.
김관용 경북도지사도 최근 이명박 대통령이 참석한 광역·단체장 및 의장, 국무위원 합동 워크숍에서 "낙동강 살리기를 통해 경제도 살리고 물도 살리는 방안의 하나로 '안동~예천간 낙동강 뱃길 복원과 소수력 발전'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제 안동의 낙동강이 웅도 경북의 비전을 책임지고 새로운 천년을 이어갈 경제의 강으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이종규기자 안동·엄재진기자 사진 정재호
자문단 김휘동 안동시장 배영동 안동대 민속학과 교수 권두현 안동축제관광조직위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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