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도심 재창조] 향촌동 토박이 심층 구술조사

입력 2009-03-26 06:00:00

▲ 해방 후인 1946년 향촌동에 문을 연 뒤 60년 넘게 운영해오고 있는 음악감상실 녹향의 이창수 대표가 25일 LP판으로 음악을 틀고 있다.
▲ 해방 후인 1946년 향촌동에 문을 연 뒤 60년 넘게 운영해오고 있는 음악감상실 녹향의 이창수 대표가 25일 LP판으로 음악을 틀고 있다.
▲ 향촌동은 일제강점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도심의 흥망성쇠를 그대로 보여주는 전형이다. 그만큼 품고 있는 이야기와 문화 자산이 많아 스토리를 통한 도심재창조를 시도해볼 만한 곳으로 꼽힌다.
▲ 향촌동은 일제강점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도심의 흥망성쇠를 그대로 보여주는 전형이다. 그만큼 품고 있는 이야기와 문화 자산이 많아 스토리를 통한 도심재창조를 시도해볼 만한 곳으로 꼽힌다.

향촌동은 대구 근현대사의 부침(浮沈)을 고스란히 안고 있다. 일제강점기에서 한국전쟁, 산업사회와 현대로 이어지면서 도심의 성쇠가 어떻게 변해가는지 보여주는 전형이다. 지금은 노년층의 사교장으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지만 품고 있는 문화예술의 역사와 경제활동의 흔적들은 대구 도심재창조의 또 다른 잠재력이다. 향촌동에 터 잡고 있는 주민들은 향촌동 곳곳에 숨은 이야기들을 발굴하고, 문화예술의 거리라는 이미지를 재구성해 다양한 세대와 계층이 넘나드는 도심으로 만들어 달라는 요구가 컸다.

이는 매일신문사가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서치21에 의뢰해 대구 중구 향촌동의 주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심층 구술조사에서 나타난 결과다. 이번 조사는 대구 도심의 변천사를 생활 속에서 함께한 사람들을 위주로 선정해 문화적 정체성과 재창조 가능성을 직접 확인했다는 측면에서 도심재창조 연구의 새로운 성과로 주목된다.

◆향촌동의 어제와 오늘

일제강점기 향촌동은 일본인들의 생활문화 중심지였다. 일본인들은 그들의 정치 경제 활동의 거점으로 대구 중심부를 장악했고, 그 가운데 향촌동은 생활과 문화의 핵심 공간이 된 것이다. 향촌동의 요정이나 찻집, 먹을거리집들은 일본 문화를 식민지에 보급하는 형태의 전형이었으며 지금까지도 향촌동의 이미지로 남아 있다.

"이 거리에 관공서가 있었고 중앙시장이 있었지. 일본인들이 주로 시장을 봤어. 어묵이나 단무지 같은 걸 많이 팔아서 일본 시장이라고 했어. 번화가라기보다 주택가였지. 해방되고 나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들어와서 흥청거렸지."(김향남씨 구술. 이하 구술자 이름만 표기)

향촌동이 오늘날 다운타운 개념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해방 후 6·25를 거치면서다. '서울 명동, 부산 남포동, 대구 향촌동'이라는 말은 이때 생긴 것이라고 시민들은 회고했다. 향촌동은 한국 전쟁의 혼란 속에서 난민문화가 탄생된 곳이다.

"전쟁 나서 피란민들, 시인, 화가들이 이쪽으로 피란을 왔어. 문인들이 많이 왔지. 대폿집이 있으니까. 그때는 전부 막걸리를 먹었는데, 시인들은 거기서 토론도 하고, 화가들도 여기 와서 지역 화가들하고 토론하고 전시회도 했지."(김향남씨)

"백조다방이라고, 거기는 문학하는 사람이 많이 모였지. 그때 대구에는 다방이 별로 없었지. 그리고 다방에는 문학하는 사람만 가는 줄 알았지. 아무나 출입하지는 않았거든."(강대진씨)

문헌과 전언에 따르면 한국전쟁 때 향촌동에는 상록, 아담, 향수, 녹향, 르네상스, 백록 등의 이름을 가진 다방이 있었다. 예술인들의 사교와 정보 소통의 공간이자 창작의 열정을 뿜던 곳으로 유명하다. 화가 이중섭은 백록다방 구석에서 담배 은박지에 그림을 그렸다고 하며, 1955년 대구에서 전시회를 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쟁이 끝난 후 향촌동은 예술인들을 비롯해 외지인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면서 일시적 공동화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대구 시민들에게 여전히 다운타운으로서 매력을 지니고 있었고, 도심으로서 공간 기능을 회복하면서 예전의 명성을 이어가게 된다.

"향촌동과 대안동 골목을 60대 초반이나 50대 후반만 돼도 잘 알지. 돈 많은 사람, 돈 적은 사람, 나이 많은 사람, 나이 적은 사람 누구나 없이 전부 다 향촌동에 왔어. 동네 전체가 추억의 거리지."(김희수(78)씨)

상권의 핵심이 동성로와 교동 쪽으로 옮겨지면서 향촌동은 상대적으로 낙후됐고, 유동인구에도 변화가 일어나면서 계층과 세대의 분화를 뚜렷이 경험하게 된다. 젊은층에게는 매력 없는 공간이 됐지만, 추억이 남아 있는 노인들에게는 싼값에 놀 수 있는 공간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

"여기는 술값이 싸서 경제가 나쁠수록 많이 와. 나이 많은 사람들이 돈은 없지만 춤은 잘추고 하니까 여기 나와서 싸게 많이들 노는 거지."(이주선씨)

오늘날 향촌동은 그야말로 실버들의 세상이다. 한적한 공원에서 장기나 바둑을 두며 소일하는 정적인 곳이 아니라 댄스와 사교 등 노인들의 문화생활이 이루어지는 역동적인 공간이다. 현지 조사 결과 성인텍이 11개나 영업하고 있었으며 오후 1~4시에는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향촌동 도심재창조 가능성

도심은 역사적으로 최근까지 정치와 생활문화의 중심지 기능을 수행해 왔기 때문에 그 흔적을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향촌동은 대부분의 중장년과 노년층의 추억 속에 강렬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일제강점기 이후 지금까지 시민들의 기억에 남아 있는 '이야기'들은 자체가 하나의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성과 현재성을 발견하고. 세대와 계층을 이어주는 중요한 매개다. 구술조사 결과 청자다방, 강마담, 이중섭, 김동진, 막걸리, 대폿집, 할매집, 현대식당 등 다양한 이야기 소재들이 발견됐다. 시민들의 참여를 통해 이를 발굴하면 도심의 흡인력을 높이는 훌륭한 재료가 될 것이다.

60년 넘는 세월 동안 음악다방 '녹향'을 운영해온 이창수(89)씨는 "해방 직후부터 지금까지 다방을 해오고 있는 것 자체가 역사"라며 "이 안에 담긴 모든 게 이야깃거리인데 운영이 어려워 지키지 못할까봐 걱정"이라고 했다. 그는 "죽은 것도 살리는데 있는 것을 왜 버리려는지 모르겠다"며 정책적 무관심을 비판했다.

주민들은 향촌동에 남은 문화와 예술의 흔적을 찾아내서 보존하는 데 큰 노력이 들지 않는데도 행정당국이 너무 소극적이라고 지적했다. 물적인 공간은 부분적으로 훼손되고 파괴됐지만 아직도 그 흔적과 이야기들은 고스란히 간직돼 있으므로 이에 대한 인적, 물적 토대를 확보한다면 향촌동만의 특색 있는 도심재창조가 가능하다는 것.

실버들의 주무대가 된 현 상황을 반영해 향촌동을 '세대를 초월하는 소통과 열정의 공간'으로 만들면 어떠냐는 의견도 나왔다. 춤추고 노래하며 교류하는 노인들을 주체로 하는 축제의 가능성도 이야기됐다. 이와 함께 수제화 골목의 가치도 새롭게 판단해야 할 것으로 지적됐다.

"수제화의 역사는 길지. 옛날에 술집이 유명할 때는 집세가 비싸서 자유극장 뒤에서 기능공으로 일하다가, 집세가 싸지면서 하나 둘 이곳으로 오면서 수제화 골목이 만들어졌어. 주변에서는 9월에 구두데이를 한번 해보면 어떠냐고 하는데 괜찮은 것 같아."(이병준씨)

수제화 골목 사람들은 나름대로 그들만의 자부심을 갖고 경제위기를 극복해가고 있었다. 이를 살려 축제를 기획한다면 그들 스스로 삶의 의미를 되찾게 하고, 시민들에게 편안한 발의 미학을 알리는 데도 기여할 것이다.

이처럼 향촌동은 역동적인 역사와 다양한 얼굴을 갖고 있다. 따라서 향촌동에서의 도심재창조란 특별한 공간 리모델링이 아니라 그들의 역사와 삶에 맞는 색깔을 입히는 것이다. 아울러 주변 공간과의 네트워크가 형성된다면 향촌동은 다시 세대와 계층을 넘나드는 도심의 모습으로 시민들에게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특별취재팀 김재경·서상현기자 사진·이채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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