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학의 시와 함께] 「가로등」/ 이시영

입력 2009-03-26 06:00:00

밤늦은 시간 누가 홀로 공원을 가로지른다

어렵게 한 세계를 놓고 떠나는 자의 그림자가

뒤에서 한없이 자유롭다

짧은 시이면서도 생략이 없다. 소묘에 가깝다. 노신이 에세이와 칼럼과 중'단편으로 세계적 문호가 되었다는 세간의 속설이 있다. 짧은 시는 깊이와 높이에 힘을 담지 않는다. 짧은 시는 사물과 삶의 단면에 앵글을 접근하여 접사시킨다. 이시영은 그러한 의미에서 초기 시편 이후로 짧은 시로 중심을 세우려는 시인이다. 그의 짧은 시들은 여러 방법이 사용되고 있으나 무엇보다 묘사가 앞선다. 쉽고 평이한 묘사에 담고자 하는 세계는 목판화의 마티에르를 차용했다. 하여 두툼하고 두꺼운 삶이 드러난다. "밤늦은 시간 누가 홀로 공원을 가로"질러 가는데 그 어둠이 시인에게는 '한없이 자유롭다'. 공원을 가로지르는 자의 모습에서 '한 세계를 놓고 떠나는' 느낌이 나왔는가는 체험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체험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우울한 풍경에서 그러한 자유가 스며들 수 있을까. 여백이란 그림과 시가 일궈낸 미학이다. 텅빈 나머지 공간에 설명으로도 다 말하지 못하는 모든 것을 쌓아놓고도 더 많은 이야기가 가능해지도록 하는 것, 그것은 짧은 시의 정점이다. 짧은 시란 긴 시에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라는 상식이 맞다면, 짧은 시는 첫 행부터 클라이막스가 시작되는 갈래이다. 따라서 짧은 시는 적극적이다. 그 적극적이라는 말에는 상승하는 격렬함과 침전하는 고요함이라는 동사와 형용사가 교직한다. 동사에는 삶의 폭발하는 에너지가, 형용사에는 삶의 조응이 단단히 맞물린 셈이다. 정서의 압축은 효과 반감이 아니라 효과 상승의 기대치가 있다. 버림으로서 더 본질에 다가간다는 것, 바로 짧은 시, 아니 시의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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