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학의 시와 함께] 「폐광촌을 지나며」/ 이건청

입력 2009-03-23 06:00:00

고한읍 어딘가에 고래가 산다는 걸 나는 몰랐다. 까아맣게 몰랐다. '사북사태' 때도 그냥 어용노조만 거기 있는 줄 알았다. 혹등고래가 산속에 숨어 탄맥을 쌓고 있는 줄은 몰랐다. 그냥 막장인줄만 알았다. 푸슬푸슬 내리는 눈발이 아이들도 개도 지우고, 유리창도 깨진 사택들만 남아 있는 줄 알았다. 고래가 사는 줄은 몰랐다. 역전 주점, 시뻘겋게 타오르는 무연탄 난로의 그것을 불인 줄만 알았다. 카지노 아랫마을 찌그러진 주점에서 소주잔을 들어올리는 사람들의 한숨인 줄만 알았다. 검은 탄더미인 줄만 알았다. 그냥 석탄인 줄만 알았다.

산간지역 고한에 고래가 산다는 놀라운 사실이 출발점이다. 그 고래의 혹은 말하자면 고한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고래란 바로 급속 성장했다가 쇠락하는 탄광지대의 모습과 아귀가 맞다. 고한/고래의 비극성은 포유류의 새끼처럼 슬프다. 그 슬픔은 그러나 바깥으로 터져나오는 울음이 아니라 머금고 자제하는 울음이다. 그리하여 시는 전체적으로 의문의 방식이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긴장감을 팽팽하게 유지했다. 이 시의 구조는 사겹의 동심원이다. 가장 바깥 동심원에 동시대의 삶이 자리 잡고 있다. 어쩌면 그것은 원이라기보다는 사각형일지 모르겠다. 세 번째 동심원에 도피처처럼 아름다운 정선의 풍광이 우리를 위로하고 있다. 이 두 개의 원은 보이지 않지만 유추 가능한 공간이다. 두 번째 동심원이 바로 이 시의 껍질이다. 즉 고한, 어용노조, 막장, 유리창도 깨진 사택, 역전 주점, 사람들의 한숨, 석탄 등이 구성하는 쇠락한 검은 색들! 그리고 그 안에 핵인 혹등고래, 그 고래는 두 번째 동심원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면서 기실 세 번째 동심원인 자연이며 동시에 우리 삶의 감춰진 역동성이기도 하다. 시인의 진술을 고스란히 따라가면 고래는 불이거나, 한숨, 석탄이면서도 불이 아니거나 한숨도 아니고 불도 아닌 그것들을 모두 껴안는 가치체계이다. 그것은 사물이 아니라 사물을 있게 하는 가치일 것이다. 혹등고래는 마음 깊이 자리 잡은 심리적 현상이다. 우리 마음 속에 자리 잡은 거대한 이 포유류는 사실 우리 내면 세계의 평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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