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 천냥 나오는 명당자리
경상감영 자리는 명나라 장수 두사충(杜師忠)의 집터였다. 그는 풍수지리에 밝아 대구의 정기는 비슬산에서 시작하여 최정산~삼봉산~연귀산~아미산(지금의 적십자병원 일대)에 이르러 멈춘다고 보았다. 그래서 아미산에서 1천 걸음을 걸어 닿은 곳, 경상감영 자리에 자신의 집터를 잡았다. 그리고는 두 아들에게 '이 터는 하루에 천냥'이 나오는 명당자리라고 말하였다.
그의 뛰어난 안목은 400년 동안 경상감영의 터가 되었다.
경상감영은 지금의 경상남북도를 관할하던 조선시대 지방관청이었다. 관찰사가 있었으며, 군사적으로나 경제'정치적으로도 그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동쪽에 경상감영을 두고 서쪽에 대구도호부 관아를 두었는데, 이것은 위계를 고려한 배치였다고 볼 수 있다. 주요 건물로는 감영과 중영을 비롯하여 객사'누각'향청'진영이 있었다. 정문인 관풍루(觀風樓)는 지금의 대구병무청 남쪽에, 통용문은 동쪽에 있었으며 두개의 뒷문이 북쪽에 있었다. 그리고 관풍루는 대구읍성을 헐 때 달성공원 안으로 옮겼다.
선화당(宣化堂'대구시유형문화재 제1호)은 관찰사의 집무소였고, 징청각(澄淸閣'대구시유형문화재 제2호)은 처소였다. 옛날에는 관찰부 아래 중영'친군남영'도호부가 있었다. 관찰부는 사법'행정의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며, 중영은 경찰사무를 담당했고 친군남영에는 수비병력이 있었다. 뒤에 중영은 폐지되어 경찰서가 설치됐고, 친군남영은 폐지되어 진위대가 되었으며, 도호부는 군청이 되었다. 도호부(都護府)는 1906년 이사청(理事廳)에서 다시 대구부(大邱府)로 개편되었으며, 1909년 지금의 대구시의회 자리에 청사를 지어서 이전하였다.
객사(客舍)는 손님을 접대하기 위한 공간이었다. 그와 함께 매월 초하루와 보름, 경축일에 대궐을 향해 절을 하며 임금을 가까이 모신다는 상징적 의미가 있었다. 그만큼 중요한 건물이었으며, 달성관(達城館)이라 불렸고, 경북인쇄소 부근에 있었다. 그리고 관찰사의 주선으로 봄가을에 앞마당에서 약령시가 열리기도 했다. 그 옆에 금학루(琴鶴樓)라는 누각이 있었는데, 대구10경에 들 만큼 명소였다.
그밖에 대구부사의 집무시설로 부아(府衙)가 있었다. 또한 선화당 측우대(測雨臺'보물 제842호), 하마비(下馬碑'정문인 관풍루 앞), 학당(學堂'지금의 호텔 아미고 자리)이, 그와 함께 지금의 대안성당과 서문로교회 자리에 옥터가 있었다. 그리고 경상감영공원 징청각 뒤쪽에 경상관찰사와 대구판관의 선정을 기리는 청덕비'송덕비'애민비'불망비 등을 한데 모아 놓았다.
일제강점기 경상감영 자리에 경북도청이 있었다. 동쪽 무궁화백화점 건물은 경상감영 영사와 중군이 있었던 자리로 일제강점기 경북도청의 상품 진열소가 있었다. 그에 따라 주변에 지역 최고의 상권이 형성되었고, 그야말로 '하루에 천냥'을 버는 명당 자리로 자리매김하였다. 그러다가 1966년 경북도청이 산격동으로 옮겨가고 난 뒤 공원이 조성돼 시민들의 쉼터로 이용되고 있다. 이따금 공원을 거닐며 영욕의 세월을 되돌아본다. 서러웠던 우리네 삶을 다시는 되풀이하지 말아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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