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백한 한국영화의 깊은 맛…다시 음미하는 수작들

입력 2009-02-28 06:00:00

퇴폐와 폭력, 사랑과 복수의 단조로운 틀에 갇혀있던 한국영화가 다양해지고 깊어지고 있다.

늙은 소와 산골 노인의 삶을 그린 영화 '워낭소리(감독 이충렬)'에는 멋있는 발차기도 깎아놓은 듯 잘생긴 배우도, 특별한 이야기도 없다. 반전이나 기막힌 속임수, 극적 긴장감도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높낮이 하나 없음에도 이 영화는 특별하다. (사실 특별하지 않은 이야기로 특별한 영화를 만들기는 어렵다.) 이 영화의 두드러지지 않은 특별함이야말로 한국 영화가 풍성해졌다는 방증이다.

영화는 마흔 살 늙은 소와 팔순 노인, 흙과 비를 통해 탁한 물과 공기에 찌든 도시인들에게 신선한 공기를 불어준다.

감독은 '유년 시절 우리를 키우기 위해 헌신했던 이 땅의 모든 소와 아버지들에게 이 작품을 바칩니다'라고 말했다. 소와 아버지(노인)의 수고를 다르게 보지 않는 것이다. 현대인들에게 소는 다닥다닥 붙은 축사에 갇힌 채 살찌기를 기다리는 가축일 뿐이다. 그러나 영화는 소가 푸른 들판을 아버지와 함께 걷던 '동지'였음을 기억하라고 말한다.

영화 '작전'(감독 이호재)은 600억원 주가 조작, 주식 사기를 주제로 하는 영화다. 국내 첫 주식(증권)영화인 셈이다. 그렇고 그런 인생을 사는 강현수(박용하)가 인생 역전타를 날리기 위해 주식에 도전하지만 몽땅 잃는다. 수년 동안 독학으로 실력 있는 '프로 개미'가 된 그는 작전주 하나를 추격해 한번에 7천만원을 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그가 건드린 것은 조폭 출신 황종구(박희순)가 작업중인 작전주였다. 협박과 몰매를 거쳐 강현수는 조폭 일당과 함께 600억원짜리 주가조작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조폭 영화에 주식을 합친 것인지, 주식 영화에 조폭을 얹은 것인지 모호하지만 기존 조폭 영화의 천편일률적인 주먹질을 벗어나 '머리'를 쓴다는 점(완전한 머리 쓰기는 아니지만)은 한국 영화의 진보를 보여준다.

특히 이 영화는 유명 배우가 아니라 연기력 뛰어난 신인급을 적재적소에 썼다는 점에서 한국 영화의 내면적 성장을 증명한다. 전직 조폭 황종구 역의 박희순, 증권 브로커 조민형 역의 김무열, 주식시장의 설거지 대가로 알려진 우박사 역의 신현종, 똘마니 조폭 덕상이 역의 박재웅은 결코 유명하거나 잘생긴 배우가 아니다. 그러나 이들의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연기야말로 이 영화의 힘이다. (잘 생긴 우리나라 유명 배우들은 얼마나 '오버'를 잘 하는지….)

이준익 감독의 2008년 영화 '님은 먼 곳에'는 1970년대 베트남에 고엽제처럼 뿌려진 한국의 우울한 초상에 관한 이야기다. 그러나 이 영화는 단순히 하나의 전쟁 이야기를 넘어서 있다. 순이의 전쟁이라고 불러도 좋을 '님은 먼 곳에'는 전쟁의 한 가운데서 자신만의 전쟁을 치르는 순이(수애)를 통해 전쟁의 정체성과 개별성에 대해 질문한다. 비단 순이뿐만 아니라 이 영화 속 한국 군인들은 한국군 병사로서, 또 개인으로서 살고 죽었다. 순이의 남편 상길(엄태웅) 역시 베트남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만의 고독한 전쟁을 치렀다. 그에게는 베트남도, 결혼도 모두 전쟁이었다.

'사랑한다고 말할 걸 그랬지, 님이 아니면 못 산다 할 것을, 사랑한다고 말할 걸 그랬지, 망설이다가 가버린 사람….' 님은 그렇게 떠났고 1960년대와 1970년대도 그렇게 가버렸다. 월남전보다 더 아픈 시대의 아픔을 담은 이 영화는 거대한 하나의 전쟁이자, 수많은 개인 저마다의 전쟁에 관한 이야기며, 하나의 이야기 속에 백 가지 이야기를 담아낸 영화다.

나홍진 감독의 영화 '추격자'는 끔찍한 범죄와 비릿한 액션이 버무려진 스릴러물이다. 실제 범죄를 소재로 해 만든 이 영화는 영화가 더 이상 '오락'이 아니라 '일상의 복원'임을, 스크린 안과 밖이 구별없음을 보여준 영화였다. 특히 등장 인물들은 흔한 통념을 깬다. 추격자 엄중호(김윤석)는 도덕과는 거리가 먼 전직 형사다. 연쇄살인범 지영민(하정우)은 정신이상자다. 지금까지 영화 속 살인이 폭력 조직의 이권 다툼이거나 개인의 복수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 영화의 살인은 병이다. 그래서 이제 살인은 이권이나 원한을 넘어선다. 이권에 개입하지 않고 원한을 사지 않아도 언제든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 사회가 원한에 빠져 있거나 고치기 힘든 질병에 걸렸다는 메시지이며, 우리는 더 이상 영화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낄 만큼 여유롭지 않다는 것이다.

이 외에 봉준호 감독의 '괴물', 박광현 감독의 '웰컴 투 동막골', 김기덕 감독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주경중 감독의 '동승', 박헌수 감독의 '주노명 베이커리' 등은 한국 영화의 소재와 이야기가 얼마나 다양해지고 깊어졌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여기에 임권택 감독의 영화 '천년학'은 '붉은 수수밭'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꿈' 등 시리도록 아름다운 외국영화를 보면서 가졌던 부러움과 씁쓸함을 위로해준 영화였다.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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