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워싱턴D.C.에서 30여분 거리. 버지니아주 도롯가에 큰 교회가 지어지고 있었다. 33만㎡(10만평) 부지에 건평만 1만9천835㎡(6천여평). 미국 한인교회로서는 최대 규모이다. 바로 워싱턴 중앙 장로교회이다. 4천500만달러(한화 약 670억원)의 예산이 드는 역사(役事)는 오는 11월 완공돼 미국 동부 교회사를 새로 쓰게 된다.
미국에 온 지 40년을 맞는 이원상(73) 목사의 기도가 이뤄지는 순간이다. 수많은 난관과 고난을 이겨낸 인간승리이고, 미국에서 한인교회를 개척해 온 그의 여정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1937년 만주에서 태어난 그는 1948년 북한과 서울을 거쳐 경산에 정착했다. "만주에서 장로로 신앙생활을 한 아버지(이성봉)의 기도의 응답으로 어려서부터 곧장 목회자의 길을 꿈꾸었습니다."
계명대에 진학한 것도 신앙의 영향이었다. 1962년 계명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개신교파가 설립한 경산의 한 직업중고교에서 4년간 교사 생활을 했다. 1968년 그는 대구 제일교회 이상근(10여년 전 작고) 담임목사의 추천으로 미국으로 건너오게 된다. 댈러스 신학교에서 4년간 유학했다.
"그 당시 유학 생활은 말할 수 없이 힘들었죠." 1주일에 20시간씩 학교 식당에서 접시를 닦고, 주당 40시간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장학금으로 학교를 다녔지만, 끼니를 때우는 일이 늘 힘들었다.
그에게 워싱턴 중앙 장로교회를 맡을 수 있느냐는 제안이 들어왔다. 1973년 설립한 중앙교회는 당시 신자가 14가정이 고작인 작은 교회였다. 그나마 신자들의 분열로 교회를 끌어가기 힘든 상황이었다.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아들(요셉)이 아팠어요. 소아과를 3~4군데 다녔지만 병명도 없이 아프기만 했습니다." 그때 이 목사는 "지금 안가면 하나님이 아들을 데려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1977년 2대 목사로 교회를 맡았다. 그러나 처음 시작하는 목회자의 길로서 가시밭길이었다. 수년간 찢어졌던 교회의 믿음을 봉합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당시 이 지역에 있던 14개 교회 중 가장 열악했다.
이때 그는 새벽기도회를 시작했다. 또 모든 가정을 심방해 교민들의 마음의 상처와 어려움을 들어주고 위로했다. "서서히 교인들이 마음을 열고 교회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3, 4년이 지나 회복 단계에 들었을 때 또 한번 분열이 일어났다. 담임목사와 교회지도자들 사이에 갈등이 생긴 것이다.
"그때 댈러스로 떠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간절히 만류하는 바람에 다시 시작하기로 작정했죠."
이후 중앙장로교회는 단 한번의 분열도 없이 성장을 거듭했다. 1985년에는 새 성전도 건립했다. "그때는 미국 교회에 더부살이를 하며 예배를 봤죠." 교인들이 교대로 금식을 하는 등 한마음이 되어 1만4천545㎡(4천400평) 규모의 현 교회를 건립했다.
기자가 이 목사를 만난 날은 수요일 점심시간이었다. 그러나 이 목사는 식사를 하지 않았다. 1984년 교회를 짓기 시작하면서 매주 수요일 금식한 것이 오늘에 이른 것이다.
중앙장로교회의 성장은 미국 교회발전에서도 드문 성공케이스다. 미국의 40만개 교회 중 5만 2천333개 교회를 대상으로 교회발전 연구에서 성공적인 13개 교회에 선정됐다. "풍파를 겪으면서도 담임목사가 떠나지 않고, 다시 신도들이 뭉친 것은 책으로도 나왔습니다." 미국 남침례교 신학대학에서 2005년 펴낸 'Break out Churches'이다.
이 목사는 2003년 은퇴했다. "한 교회만을 섬기고 끝낸 것은 은총이고, 감사할 일이죠."
힘든 초기 이민사에서 교회의 역할은 컸다. "이민자들이 당하는 어려움과 외로움을 함께 해결하는 하나의 구심점이었죠." 교회를 통해 문화적 충격과 실향의 아픔을 달랬다.
이 목사는 동부지역을 떠나 미국의 한인교회사에 지대한 역할을 해왔다. 미국 내 250여 한인교회들이 초교파적으로 연합하여 지역복음화를 할 수 있게 했으며, 선교사업인 'SEED International'을 통해 세계 28개국에 선교사역을 펼치고 있다. 또 한인노인들이 미국 생활에 적응할 수 있도록 '중앙 Senior Center'를 설립하고, 중앙한글학교를 개교해 2세들에게 한글과 역사, 문화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지난 2002년에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미국 하원에서 개회기도를 주례하기도 했다. 2003년 그가 은퇴하자 미국의회는 경의를 표하는 의미에서 의회기록으로 남겼다.
그는 최선을 다해 깨끗한 삶을 살면서 기도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평생을 살아왔다. 하나님을 공경하고 기쁘게 하는 삶을 살아온 것이다. "늘 부족하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는 가족을 사랑하고,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인간됨의 첫 출발이라고 믿고 있다. 현재 그는 42년 째 장모님(강옥화 권사·96세)을 모시고 있다. 1966년 결혼해 힘들 때마다 옆에서 힘이 되어준 아내(김영자)에게도 한없는 감사의 말을 전했다.
버지니아에서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이재명 90% 득표율에 "완전히 이재명당 전락" 국힘 맹비난
권영세 "이재명 압도적 득표율, 독재국가 선거 떠올라"
[우리 아기가 태어났어요]신세계병원 덕담
"하루 32톤 사용"…윤 전 대통령 관저 수돗물 논란, 진실은?
'이재명 선거법' 전원합의체, 이례적 속도에…민주 "걱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