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약자의 편에 섰을 뿐…" 김수환 추기경의 삶과 신앙

입력 2009-02-17 09:17:22

한국 사회의 정신적 지도자이자 종교계의 큰 어른이었던 김수환 추기경은 전 생애를 신앙 속에서 살다가 16일 선종(善終)했다.

김 추기경은 1922년 5월 8일(음력) 대구시 남산동 225의 1번지에서 부친 김영석(요셉)과 모친 서중화(마르티나)의 5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조부 김보현(요한) 때부터 집안이 천주교 신앙을 이어와 그는 자연스럽게 유아 세례를 받았다.

박해받던 시절 천주교 복음을 받아들인 조부는 1868년 무진박해 때 충남 논산군 연산에서 체포돼 감옥에서 아사(餓死)했다. 조모 강말손도 남편과 함께 체포됐으나 임신 중이어서 석방돼 부친 영석을 낳았다.

유복자로 태어난 부친 영석은 성장한 뒤 영남 지방으로 이주해 옹기 장사를 하다가 혼인한 뒤에 대구에 정착했다. 그러나 천주교에 대한 일제의 탄압으로 한 장소에서 옹기점을 운영하기 어려워 이곳저곳을 전전했다. 김 추기경의 나이 다섯 살 때 그의 집안은 경북 선산에서 군위로 이주했고, 이때부터 부친은 옹기점과 농업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김 추기경의 어릴 적 꿈은 장사꾼이 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는 회고록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읍내 상점에 취직해서 5, 6년쯤 장사를 배워 독립한 후 25세가 되면 장가를 갈 생각"이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모친의 희생과 사랑에 힘입어 김 추기경은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초등학교 과정인 군위공립보통학교 1학년 때 부친을 여의었던 김 추기경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모친의 권유에 따라 세 살 많은 형 동한(밀알회 창립자)과 함께 성직자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보통학교 5년 과정을 마친 김수환은 1933년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 예비과에 진학해 성직자로 나가는 첫걸음을 내디뎠다. 이후 서울의 소신학교인 동성상업학교에 입학했다.

신학교에 들어갔지만 그가 순순히 사제의 길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신학교를 그만두고 싶은 마음에 꾀를 부리기도 하고, 동성상업학교 3학년 때는 죄같지 않은 죄까지 꼬치꼬치 고백해야 마음이 편한 이른바 '세심병(細心病)'을 앓으면서 스스로 신부가 될 자격이 없다고 여겨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말했다가 꾸지람만 들은 적도 있었다.

동성상업학교 시절 김수환은 일제에 대한 울분을 일기장에 적을 정도로 강렬한 민족의식을 갖고 있었다. 졸업반인 5학년 때 '황국신민으로서 소감을 쓰라'는 시험 문제를 받고 "황국신민이 아니어서 소감이 없다"고 썼다가 교장 선생에게 불려가 뺨을 맞기도 했다.

교장 선생은 김수환의 뺨을 때렸지만 대구교구 장학생으로 일본 유학을 떠날 수 있도록 추천했다. 당시 교장 선생은 제2공화국 때 국무총리를 지낸 장면(1899-1966) 박사였다.

김수환은 동성상업학교를 졸업한 해인 1941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도쿄의 상지대학 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했다. 졸업을 얼마 남겨 놓지 않았던 김수환은 일제의 강압으로 학병에 징집돼 도쿄 남쪽의 섬 후시마에서 사관 후보생 훈련을 받기도 했다.

김수환은 이듬해 태평양전쟁이 끝나면서 상지대학에 복학해 학업을 계속하다가 1946년 12월 귀국했다. 다음해 초 서울의 성신대학(가톨릭대 신학부)으로 편입한 그는 4년 뒤인 1951년 9월 대구 계산동 주교좌 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가 사제 서품을 앞두고 고른 성구는 시편 51장 '하느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였다.

이에 대해 그는 회고록에서 "과연 한평생 착한 목자로 살 수 있을까? 장점보다 단점이 많은 내가 오히려 하느님 앞에서 죄인으로 남을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은가. 그렇다면 내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성찰하고 고백해야 할 것은 '하느님 저는 죄인이오니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말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라고 밝혔다.

김 추기경은 스물아홉 살에 사제 서품을 받고 경북 안동 본당(지금의 목성동 주교좌 본당) 주임 신부로 사목의 첫발을 내디뎠다. 첫 부임지였던 안동 본당과 그곳의 순박했던 시골 사람들은 김 추기경에게 유난히 애틋한 기억으로 남았던 모양이다. 김 추기경은 김천 본당 근무를 포함해 2년 반 정도의 짧은 본당 사제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고 회고하곤 했다.

김 추기경은 안동 본당 주임신부를 거쳐 1953년 4월 대구교구장 최덕홍(요한) 주교의 비서, 대구교구 재경부장, 해성병원 원장, 그리고 1955년 6월 경북 김천 본당 주임 겸 성의중·고교 교장으로 전임됐다.

1956년 독일 유학길에 오른 김 추기경은 뮌스터 대학에 적을 두고 7년간 그곳에 체류했다. 그때 만난 요셉 회프너 교수에게 배운 '그리스도 사회학'은 김 추기경이 그리스도 사상에 기초한 인간관과 국가관을 정립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독일 유학시절은 교황 요한 23세가 소집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가 열리고 있었던 시기였다. 당시 독일에서는 공의회 정신에 따라 시대에 걸맞은 교회를 만들기 위한 변화와 쇄신의 물결이 요동치고 있었다. 자기 세계에 갇혀 있는 교회의 문을 활짝 열고 세상과 대화하고 소통하려는 쇄신운동이었다. 이에 대해 김 추기경은 회고록에서 "가톨릭교회가 쇄신을 통해 시대의 변화에 적응해야 한다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바람은 예전에 느껴보지 못한 강한 바람이었다"면서 "독일에서 겪은 그런 체험은 훗날 주교와 추기경으로서 소임을 수행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밝혔다.

귀국 후 가톨릭시보사(현 가톨릭신문사) 사장을 지내며 교회 언론의 초석을 다졌고, 1966년에는 신설된 마산교구의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됨과 동시에 주교품을 받았고 그로부터 2년 뒤 서울대교구장에 올랐다.

서울대교구장에 임명된 것은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당시 주한 교황대사 히폴리토 로톨리 대주교로부터 급히 상경하라는 전갈을 받고 대사관에 들어선 김 추기경은 '대주교로 승품되어 서울대교구장직을 맡게 됐다'는 놀라운 말을 듣는다. 주교가 된 지 2년밖에 안 된 주교단의 막내인 그에게 서울대교구는 무겁고 부담스러운 십자가였다.

일약 한국 천주교의 중심 인물이 된 김 추기경은 이후 30년 동안 서울대교구장으로 재임하면서 현대사의 성지가 됐던 명동성당과 함께 한국 사회의 영욕을 몸소 겪어야 했다. 서울대교구장 취임미사 강론을 통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에 따라 세상 속의 교회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밝혔던 그는 이듬해인 1969년 우리나라 최초로 추기경에 임명된다. 당시 그의 나이 47세로 전세계 추기경 136명 가운데 최연소자였다.

1970년대 가톨릭교회와 명동성당은 유신정권에 맞서 싸우는 민주화 운동의 구심점이었다. 김 추기경은 회고록에서 "당시 본의 아니게 여러 사건과 사태를 겪으면서 인권 사회 정의 운동의 한가운데 있었다"면서 "정부 압력은 물론 교회 안에서 쏟아지는 비판까지도 홀로 감수해야 하는 내 심경을 말이나 글로 표현하기 힘들다"고 고백했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출범하면서 교회의 현실 참여문제로 내부에서 갈등이 빚어지고, 1974년 이른바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지학순 주교를 비롯한 여러 사제들이 옥살이를 하는 등 교회와 정부의 골도 깊어져만 갔다. 그러나 이 시기에 김 추기경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에 따라 교회의 현실 참여는 옳은 방향이라고 여겼다. 김 추기경은 1971년 성탄 자정 미사에서 장기집권으로 향해가는 박정희 정권의 공포정치를 비판하는 강론을 했고, 이듬해 8월에 시국성명을 발표함으로써 박 정권과 충돌했다.

1980년대 명동 성당은 민주화 운동의 해방구였다. 특히 1987년 6월 민주화운동 때 명동성당은 권력에 맞서 싸우는 마지막 보루였다. 김 추기경은 당시 명동성당에서 농성 중이던 학생들을 연행하려던 경찰 병력의 투입을 끝까지 막아냈다. 살얼음판 같던 시대를 헤쳐오면서 얻게 된 불면증은 김 추기경을 30년 넘게 괴롭혔다. 그 시절에 대해 김 추기경은 "나는 1970, 80년대 격동기를 헤쳐 나오면서 진보니, 좌경이니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정치적 의도나 목적을 두고 한 일은 더더욱 없다. 가난한 사람들, 고통받는 사람들, 그래서 약자라고 불리는 사람들 편에서 그들의 존엄성을 지켜주려 했을 뿐이다"고 회고했다.

김 추기경은 이 같은 정치적 격동기 속에서도 한국 천주교의 기틀을 다지는 굵직한 행사를 치러냈다. 1981년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 신앙대회, 1984년 한국 천주교회 창립 200주년 기념행사, 1989년 제44차 서울 세계성체대회 등은 한국 가톨릭 교회가 도약하는 계기를 만든 행사들이다.

김 추기경을 만나 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김 추기경님은 정의롭고 따뜻한 분이었다. 무엇보다 유머감각이 뛰어나 무겁고 어려운 자리에서도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고 말한다.

종교인이자 사회 지도자로서 시대의 한복판에 섰던 김 추기경은 교황청에 사임 의사를 밝힌 지 6년 만인 1998년 서울대교구장직에서 물러났다. 은퇴 후 2002년 북방 선교에 투신할 사제를 양성하기 위한 '옹기 장학회'를 공동 설립하는 등 북한 선교를 위해 노력했고, 한국 사회의 큰 어른으로서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왔다.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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