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무죄 무전유죄 줄어들까?…대법원 '양형기준안' 제시

입력 2009-02-14 06:00:00

법전에는 죄마다 형의 범위를 정해놓았는데 이를 법정형이라고 한다. 법정형에서 법률이 정한 가중사유나 감경사유를 적용한 형량을 처단형이라 하고, 이 처단형에서 여러 양형사유를 참작해 법관이 재량으로 선고형을 정할 수 있다. 이때 법관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형량 차이가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형량 범위를 정해둔 것을 '양형기준'이라고 한다. 대법원 산하 양형위원회는 지난해 11월 살인죄·성범죄·뇌물죄에 대한 양형기준안을 제시한 데 이어 이달 초 위증·무고죄, 횡령·배임죄, 강도죄에 대한 기준안도 내놓았다. 대법원은 이들 8개 범죄에 대한 양형기준안을 오는 4월까지 확정·의결한 뒤 늦어도 올 하반기부터 시행에 들어갈 예정이다. 양형기준을 만든 이유는 그간 논란이 됐던 '고무줄 판결'을 개선하기 위해서다. 죄를 지은 정도가 비슷해도 판결된 처벌 내용은 천차만별인 사례가 많았다는 것. 성낙송 양형위 상임위원(서울고법 부장판사)은 "양형기준이 이론의 여지 없이 적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과거 국민 불만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과연 사라질 것인가?

'힘 있고 돈 많은 ×는 수억원을 받아도 풀려난다'는 국민적 공분을 자아내며 '고무줄 판결' 비판의 주대상이었던 뇌물죄. 양형기준안에 따르면, 뇌물을 받은 공직자들은 상응하는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될 전망이다. 뇌물죄는 금액에 따라 5가지 유형으로 나뉘어졌고, 기존 선고형량에 비해 6개월~1년까지 형량이 높아졌다. 가령 5천만원 이상 뇌물을 수수한 경우는 제3유형 이상에 해당한다. 아무리 처벌을 줄여줄 사유가 있더라도 최하 3년 6개월로 형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과거처럼 집행유예를 기대하기 어렵게 됐다. 집행유예를 결정하려면 3년 이하의 징역형이 선고돼야 가능하기 때문. 아울러 ▷피의자의 신분상실 또는 사회적 명예실추 우려 ▷뇌물로 받은 금품을 전부 몰수했을 경우 ▷범행과 관련해 소속 집단으로부터 이미 징계처분을 받았을 경우 등에 대해 과거에는 '정상 참작'을 통해 집행유예까지 가능했지만 이번 양형기준안에는 이를 감경요소, 즉 처벌을 줄여주는 요소로 적용할 수 없도록 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뇌물을 준 사람은 처벌하지 않았던 관행을 바꿔 이들도 함께 처벌토록 했다. 5억원 이상 뇌물 수수자에게는 최대 무기징역까지 선고가 가능하다.

대표적인 화이트칼라 범죄인 횡령·배임에 대한 구체적인 양형기준도 마련됐다. 횡령·배임죄는 범죄를 통해 얻은 이득에 따라 형량이 결정된다. 50억원 이상 이득을 얻은 경우는 원칙적으로 실형을 선고토록 했고, 300억원 이상 이득을 얻었다면 최고 징역 11년까지 선고될 수 있다. 피해자가 많거나 범행 수법이 불량한 경우는 가중처벌된다. 기업인에 대한 집행유예 남발을 막기 위해 집행유예 고려 요소를 적시했다. 아울러 위증·무고죄에 대한 구체적 기준도 제시했다. 위증죄는 일반위증죄와 꾀를 써서 타인을 해할 목적으로 법정에서 허위진술하는 모해위증죄로 나눴다. 위증을 대가로 이익을 얻거나 위증이 재판 결과에 영향을 미친 경우 가중 처벌한다.

◆'고무줄 양형' 해결에는 한계가 있다

뇌물수수죄의 경우, 제1유형을 3천만원 이하로 정했다. 때문에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주장도 나온다. 대부분 뇌물을 주고받는 범위가 3천만원 이하라는 점을 감안할 때 수수액을 더욱 세분화한 뒤 형량을 예측 가능토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초범이거나 수사개시 전에 뇌물반환, 20년 이상 장기근무, 피고인의 중병 등을 집행유예 결정의 긍정적 요소로 정해 놓았다. 양형위원회가 설치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재벌총수들의 비리나 화이트칼라 범죄에 대해 그간 관대했던 법원의 선고 경향. 하지만 앞서 집행유예의 긍정적 요소로 제시된 것들은 그간 법원이 집행유예 사유로 내세웠던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비판을 면치 못할 전망이다.

참여연대는 "판사의 자의적인 판단이 개입될 양형기준이 여전히 많아 '솜방망이 처벌'이 반복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형량을 낮춰주거나 집행유예를 선고하는 요소 중 '중병' '구금이 부양가족에게 과도한 곤경 수반' 등의 자의적 적용 우려가 있는 요소가 남아 있다"며 "아울러 감경요소로 제시된 '초범'의 경우, 국회의원이나 자치단체 의원 등 선출직 공직자를 제외한다면 실제 뇌물수수로 기소되는 공직자들은 대부분 초범인데, 초범을 감경할 것이 아니라 재범 이상을 가중 처벌하는 기준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횡령·배임죄의 경우에도 집행유예를 선고할 수 있는 긍정적 요소로 '진지한 반성 여부' '범행 동기 참작' 등이 포함돼 있다. 문제는 이를 판단할 명확한 기준이 없다는 것. 이 부분 역시 법관의 자의적 판단이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요소라는 비판이 있다. 대법원 측은 "양형 인자에 대한 정의가 추상적이라는 지적이 있어 구체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며 "그러나 전체적으로 형량이 높아졌고 양형기준을 제시한 만큼 '고무줄 판결'에 대한 논란은 해소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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