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지인과 만나 점심 한끼를 먹는데 식당에 켜놓은 TV에 눈이 갔습니다. 케이블TV 음악 전문 채널이었는데 자막이 이상했습니다. '謹賀辛年'(근하신년). 중간에 한 자가 '새 신(新)'자가 아니라 '매울 신(辛)'자로 되어있었던 겁니다. 글자 그대로라면 '삼가 새해에는 매운맛 보시라'는 뜻이 되는군요. 제작진의 실수였는지 의미심장한 장난이었는지는 알기 어려웠지만, 요즘 세상살이가 외환위기 이래 가장 고달프다 보니 오히려 '신'(辛)이라는 글자가 가슴에 팍팍 꽂혀 실소가 나왔습니다.
속칭 '리얼 버라이어티'라는 예능 프로그램 전성시대인 요즘, SBS의 '패밀리가 떴다' 대본이 최근 인터넷에 공개되면서 리얼리티 논란이 일고 있다 합니다. 공개된 대본에는 출연자들간의 대화를 비롯해 사소한 행동까지 상세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리얼리티를 표방했던 탓에 시청자들은 배신감에 불만을 토로합니다.
방송 제작 속성상 예능 프로그램에서 100% 순도의 리얼리티를 기대하는 것은 애초부터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구하는 거나 마찬가지이겠지요. 아무 대본 없이 그냥 출연진들의 애드립에만 맡겨놓는다면 막장 프로그램이 되거나 촬영 시간이 한정없이 늘어져, 출연자들의 바쁜 스케줄을 맞출 수 없을 겁니다. '우리 결혼했어요'라는 프로그램만 봐도 그렇습니다. 문틈으로 가난이 파고들면 행복은 대문밖 저멀리 달아나는 것이 인생일진대, 경제문제 및 성(性)에 대한 고민 없는 결혼은 허깨비 놀음에 불과하겠지요.
현실로 돌아와 봅니다. 뉴스를 보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인 각박함과 마주합니다. 이스라엘 군이 가자 지구를 폭격해 수백명의 민간인이 희생됐다는 뉴스가 타전됩니다. 인간들이 저지르는 잔혹의 끝은 어딜까요. 국내로 시선을 돌려봐도 혹독한 경제 위기에 서광이 비친다는 뉴스를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요즘 우리 사회를 보면 경쟁이라는 미명 하에 소수를 위한 승자독식 구조가 고착되는 방향으로 가는 것 같습니다. 입시에 모든 것을 쏟아붓지만, 정작 학력 인플레이션이 심각해 고등학력으로도 취직에 별 도움이 안 됩니다. 이러다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서민들은 나락에서 헤어날 수 없는 사회가 되는 것이 아닌가 두렵습니다.
예능 프로그램 어디에도 그런 골치 아프고 눈쌀 찌푸리게 하는 '시츄에이션'이 없습니다. 티격태격대지만 갈등은 웃음을 줍니다. 그러면서도 '이건 진짜야'라고 선전합니다. 근심 걱정과 인생의 쓴맛 없는 경계를 보여주는 리얼 버라이어티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 겁니다.
IMF 외환위기를 겪은 90개국 가운데 90%가 다시 외환위기를 겪었다고 합니다. 외환위기를 초래한 기업·금융부실을 가계로 전가하는 방법을 통해 그 위기를 극복했기 때문이지요. 그 과정에서 양극화가 심화되고 중산층은 무너졌습니다.
정부는 천문학적 규모의 건설경기 부양으로 작금의 위기를 타개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건설회사 부도 및 금융권 부실 채권이 발생하는 것을 막겠다며 부동산 시장에 거품을 유도해서는 절대 안 될 겁니다. 그 방법으로 외화 유동성 위기를 극복할 경우, 위기의 본질이 가계 부문으로 전가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나중에 다시 외환위기가 발생할 수 있는 겁니다. 지금은 정부의 역할이 여느 때보다 중요한 상황입니다. 정부가 실패하면 1년 뒤 국민들은 '근하辛년'을 맞을지도 모릅니다. 정부가 현명한 판단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김해용 기획취재부장 kimh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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