戰後 국민들에 따뜻한 위로.격려/애틋한 향수 향토팬 가슴에 새겨
1950년 6월에 일어난 한국전쟁은 그 무엇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집단살상과 폭력으로 온 국토가 얼룩진 대참사였습니다. 서울이 파괴되고, 수도는 부산으로 옮겼습니다.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이 어쩔 수 없이 부산과 대구로 나뉘어졌던 1950년대 초반 풍경은 이제 우리 기억 속에서 마치 빛바랜 한 장의 흑백사진처럼 쓸쓸하게 남아있습니다. 그러한 1951년, 몹시도 황량했던 피란시절, 당시 대구극장에서는 제1회 오리엔트레코드사 주최 전속가수 선발 경연대회가 열렸습니다. 이 대회에 고등학교 3학년 재학생 하나가 까까머리에 교복 차림으로 출전하여 입상의 영예를 안았습니다.
본명은 방창만(方昌萬'1930~2005), 경북 경산에서 태어나 경산초등학교와 창성중학교를 졸업했고, 콩쿠르 출전 당시에는 경산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지요. 방창만은 계성고등학교 재학생이었던 도미(본명 오종수) 등과 함께 우수한 성적으로 입상하였습니다. 방창만은 그때 '대동강 달밤'(문일화 노래)을 불러 호평을 받았는데, 새로 전속가수가 된 방창만에게 오리엔트레코드사 사장이자 작곡가였던 이병주 선생은 방태원(方太園)이란 예명을 지어주었습니다. 대구 송죽극장 맞은편에 있었던 이 오리엔트레코드사에서 방태원은 '낙방과객' 등 6곡을 연속으로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전쟁 직후의 황폐한 사회적 여건 속에서 뚜렷한 히트곡이 없는 가수의 생활은 삭막하고 힘겹기만 했습니다.
오리엔트 전속가수 선발 이후 이렇다 할 성과 없이 허송세월하던 방태원은 가수 남백송과 각별한 우정을 나누며 새로운 성공의 길을 찾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방태원은 작곡가 백영호 선생과 그야말로 운명적 만남으로 인연을 갖게 됩니다. 방태원의 뛰어난 가창력을 확인한 백영호 선생은 서울 미도파레코드사(지구레코드사 전신) 소속 전속가수가 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이를 터전으로 해서 여러 히트곡이 발표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무렵 예명도 방태원에서 방운아(方雲兒)로 다시 바꾸었습니다.
방운아가 발표한 가요작품에는 1950년 한국전쟁을 혹심하게 겪으며 몸과 마음이 시달리고 지친 당시 전후 한국대중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격려가 담겨 있습니다. 대표곡으로는 출세작품이었던 '마음의 자유천지'를 비롯하여 '부산행진곡' '인생은 나그네' '한 많은 청춘' '두 남매' '여수야화' '경상도 사나이' '일등병 일기' 등 다수가 있습니다.
백금에 보석 놓은 왕관을 준다 해도/ 흙냄새 땀이 젖은 베적삼만 못 하더라/ 순정의 샘이 솟는 내 젊은 가슴속엔/ 내 맘대로 버들피리 꺾어도 불고/ 내 노래 곡조 따라 참새도 운다
세상을 살 수 있는 황금을 준다 해도/ 보리밭 갈아 주는 얼룩소만 못 하더라/ 희망의 싹이 트는 내 젊은 가슴 속엔/ 내 맘대로 토끼들과 얘기도 하고/ 내 담배 연기 따라 세월도 간다
---'마음의 자유천지'(손로원 작사, 백영호 작곡, 방운아 노래) 전문
그의 잔잔하고도 정겨움이 감도는 성음의 노래는 추억의 가요팬들에게 방운아의 노래는 애틋한 향수와 그리움을 지닌 노래로 언제나 다정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최근 소식에 의하면 가수 방운아의 노래를 사랑하는 경산지역 주민들과 '경산중앙로타리클럽'이 뜻을 모아 2009년 상반기 중에 노래비 건립을 추진한다고 합니다. 이처럼 아름답고 흐뭇한 미담은 전국적으로도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현재 많은 노래비가 전국 곳곳에 세워져 있으나, 정녕 우리 지역이 배출한 소중한 가수 방운아를 기념하는 멋진 노래비가 세워지고 더불어 '방운아 가요제'까지 해마다 열리게 된다면 그 얼마나 뜻 깊고 자랑스러운 일일까요. '방운아 노래비'가 가수의 고향인 경산의 어느 곳에 세워져서 시민들의 따뜻한 박수 속에 제막식을 올리게 될 감격의 그날을 떠올려 봅니다.
이동순 시인.영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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