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백두를 가다] 봉화 하면? '춘양목과 억지춘양'

입력 2009-01-09 06:00:00

▲ 고선계곡에 사는 안세기(오른쪽)씨.
▲ 고선계곡에 사는 안세기(오른쪽)씨.

봉화 하면 떠오르는 것은? '춘양목(금강송)'과 '억지춘양'이다.

사학자이자 춘양면의 만산고택 주인인 강백기씨는 '억지춘양'에 대해 두 가지 설을 내놓았다. 해방 전 영주에서 강원도 철암까지 철도 개설공사 계획이 춘양을 거치지 않도록 설계돼 있었는데, 자유당 때 권력 실세였던 봉화 출신의 모 정치인이 '억지로 춘양을 거치도록' 계획을 변경시켜 '억지춘양'이라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지금은 이 철도가 춘양 발전을 저해하는 걸림돌이라고 했다.

또 궁궐자재나 왕실의 장례용 관을 짜는데 쓰인 춘양목이 너무 인기가 있자 당시 전국의 세도가들이 억지로 춘양목을 가져가 집 등을 짓는데 썼다고 해 '억지춘양'이라는 말도 나왔다고.

춘양목은 그 유명세만큼이나 슬픔도 있다. 고선계곡에서 만난 안세기(83)씨는 70년째 고선계곡에 살고 있다. 안씨는 평생 춘양목의 아픔을 경험한 산증인이다. 안씨는 일제 때 고선계곡에는 총칼을 든 일본 경찰과 인부들밖에 없었고, 밤낮으로 아름드리 춘양목을 벌목해 실어 날랐다고 했다. 당시 계곡에는 일본 주재소가 있었고, 주재소 인부만 300명에 달했다고 한다.

벌목 기간만 무려 17년으로 당시 계곡의 춘양목이 얼마나 울창했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주재소는 벌목한 춘양목을 차에 실어 열차로 부산으로 옮겼다고 한다. 벌목한 춘양목 중에는 직경이 무려 2m나 되는 나무들이 즐비했다고 기억했다. 안 씨는 "장정 6명이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밥을 먹을 정도"라고 말하니 그 크기를 짐작하고도 남겠다.

이종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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