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왕의 무사·왕비 '혼돈의 사랑'…영화 '쌍화점'

입력 2009-01-03 06:00:00

유하 감독의 다섯 번째 작 '쌍화점'은 고려 궁중의 치정극이다. 은밀한 궁궐 내실에서 벌어지는 욕망의 삼중주를 동성애 코드와 파격적인 노출, 찌르고 찔리는 사극의 칼싸움으로 포장했다.

이 영화의 배경은 원의 지배를 받고 있는 고려이다. 유교가 전파되기 전 고려의 성관념은 조선과 달랐다. 여성의 성적 억압도 크지 않았다. 예를 들어 이번 주부터 방영되는 TV 드라마 '천추태후'도 세칭 불륜녀이다. 왕의 비였으나, 18살에 과부가 되어 외척이던 남자와 정을 통했다.

'쌍화점'의 애증의 얼개는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시작된다. 고려의 왕(주진모)은 원나라의 위세에 눌려 기를 못 펴는 인물이다. 원에서 온 왕비(송지효)에게 정을 느끼지 못하고, 더한 것은 여성과 성관계를 맺지 못하는 것. 그는 왕의 경호를 위해 결성된 꽃미남 그룹 건룡위의 총관인 홍림(조인성)을 침실에 들여 총애한다.

홍림과 왕, 왕비의 흔하지 않은 삼각관계는 원의 간섭으로 판이 뒤바뀐다. 왕비가 후손을 얻지 못하자 원은 부마국 고려에게 압박을 가하기 시작한다. 친원파를 세자로 책봉하려고 하고, 친원파 대신들도 호시탐탐 왕위 찬탈을 노린다. 왕은 왕비에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오"라며 은밀한 제안을 한다. 홍림을 왕비와 관계를 맺게 해서 아이를 낳게 해 세자로 내세우려는 것이다.

사랑은 '하는 것'이 아니라 '오는 것'이다. 어느 순간 가슴 속에 폴폴 피어나는 사랑에 흠칫 놀라는 것, 그것이 사랑의 신비이다. 원에서 먼 고려로 와서 왕의 손길 한번 받아보지 못한 왕비가 이제 사랑에 눈을 뜨게 된다. 처음에는 분노로 홍림과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한번 성을 겪은 몸은 해서는 안 되는 연모의 정까지 동반한다. 그것은 홍림도 마찬가지다. 이제 왕은 배신과 질투, 집착의 화신이 된다. 모든 권력을 가진 왕이 남자에게, 또 여자에게 버림받고, 신하에게마저 외면당하면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쌍화점'은 애증에 몸을 떠는 삼각관계의 통속성을 그리고 있다. 보편적인 그것과 다르다면 양성애와 동성애, 원과 고려라는 지배와 피지배의 성, 그리스 비극과 비견되는 극단적 결말이 끼어든다는 것이다.

'말죽거리 잔혹사'와 '비열한 거리'의 유 감독은 격한 감정을 스크린에 잘 녹여 넣는 감독이다. '쌍화점'에서도 스케일은 크지 않지만, 사극이 가진 장점으로 잘 묘사해 내고 있다. 홍림에게 느끼는 성적 분노는 불꽃 튀는 검 대결로, 반역의 연판장을 쓴 신하들에 대한 분노는 연회장에서 철퇴로 박살내는 끔찍한 장면으로 그려낸다.

특히 세 사람의 은밀한 관계에 대한 성적 묘사는 민망할 정도로 대담하고 과감하다. 왕과 홍림의 침실 동성애 장면은 이제까지 어느 한국영화에서 보여주지 못한 사운드와 영상으로 그려준다.

홍림과 왕비의 섹스신도 '미인도'보다 훨씬 적나라하고 노골적이다. 초반 성적 희생양이던 둘이 점차 회를 거듭하면서 온갖 테크닉이 난무한다. 전라의 남녀가 치르는 섹스 중 어느 장면은 둘의 감정의 진폭을 넘어서는 것도 있다. 아마 노골적인 정사장면으로 '18세 관람가'의 화끈한 흥행성적을 고려한 감독의 노림수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러나 여배우 송지효는 왕의 남자로 질투하던 홍림과 성관계를 맺으면서 차츰 그의 몸속으로, 마음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가련한 여인을 세밀하게 잘 연기하고 있다. 왕의 그림자가 비치는 내실에서 참았던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비련의 여주인공이 되어간다.

'쌍화점'은 유 감독의 작품 중에 가장 상업적 색채가 흘러내린다. 사극의 볼거리와 그 속에 녹아든 애증의 숨 가쁜 호흡을 그려 내려는 감독의 압박감도 함께 묻어난다. 그러나 드라마는 후반, 상투적인 길을 걸으면서 호흡이 다소 처진다. 스펙터클한 사극적 볼거리도 많지 않은 편이다.

그러나 유 감독 특유의 직설적인 어법은 여전하다. 가두어진 영혼이 원초적 욕망으로 해방되지만, 결국 연모의 절절함에 다시 갇히는 비극미는 그가 이 영화에서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이다. 한 치 앞이 낭떠러지더라도 달려가야 하는 운명, 그것이 정인(情人)에게 해 주는 원의 음식인 '쌍화점'의 치명적인 달콤함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굵은 선은 관객에게 어떤 식으로 비쳐질 지는 미지수다. 뜬금없이 터지는 관객의 웃음이 당혹스럽다. 서고에서 섹스를 치른 왕비가 홍림에게 "내일 자시(子時)에 다시 오겠다"고 하는 대목이나, 왕이 '쌍화점'을 부르는 장면 등에서 객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애절함이 관객에게 코믹함으로 비쳐지는 것을 감독은 예측했을까. 133분. 18세 관람가.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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