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겨울 여행

입력 2008-12-30 06:00:00

노트북 안에 다운받아서, 오래 간직하고 있는 다큐멘터리 한 편이 있다.

파울로 코엘료가 직접 길을 안내하고 노래도 부르는 '산티아고 가는 길'이다. 방학을 맞이하면서 갖는 개인적인 꿈이 있다면, 그 '산티아고 가는 길'로 언젠가 순례여행을 하는 일이다. 모든 순례의 길은 빨리 걷고 있을 때조차도 천천히 자신의 속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라던가. 그러나 산티아고 여행 계획은, 함께 떠날 수 있는 친구를 찾을 때까지 일단 잠재워 놓고, 겨울방학을 맞은 나는 잠깐 제주도의 올레를 다녀오게 되었다.

올레는 제주 방언으로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특별자치도인 제주도가 문화체험관광을 위한 정책적인 개발 코스로 도보 여행이 가능한 방사형의 올레를 만들었다. 그런데 그 벤치마킹을 바로 산티아고 가는 길로부터 해왔다고 한다.

바다목장 올레 3코스는, 모퉁이를 돌면 또 다른 길이 펼쳐지는 우리 인생처럼, 해변과 목초지와 들길을 번갈아 굽어 돌면서 3km가량 걷게 되어 있었다. 목초지에선 귤 껍질 마르는 향긋함이 깔려 있지만, 해변으로 접어들 땐 파도에 뾰족해진 화산돌이 발길을 위태롭게 했다. 그리고 들길에선 빗물 고인 웅덩이가 신발을 흠뻑 적시기도 하는 것이다.

올레를 걷던 시간 동안, 적막감과 그리움이 스민 제주의 푸른 풍광에 기댄 내 몸과 마음이, 한없이 평화로웠다. 무거운 외투도 벗고, 가방도 들지 않아서 그리 가볍게 걸을 수 있었던 것일까. 여행을 하다 보면 가장 먼저 깨닫는 것이, 짐이 가벼워야 한다는 것이다.

올레 3코스의 끝에는 김영갑 두모악 갤러리가 있었다. 그런데 그곳이야말로 제주의 산티아고라고 불러도 좋을 만한, 빛과 예술혼이 깃든 성소였다. 김영갑은 원래 서울에 주소지를 둔 사람이지만 제주를 사랑해서 평생 섬의 외로움과 평화를 카메라에 담다가 죽은 분이다. 제주의 혼-오름과 바다, 들판과 구름, 노인과 해녀, 억새와 꽃-을 사진작품으로 남긴 그는 불치병인 루게릭병을 앓으면서도 사재를 털어 갤러리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그의 뼈도 뿌려져 그가 남긴 작품들과 함께 전율 같은 감동을 뿜어내고 있었다.

코엘료가 말했다. "정치, 경제의 다리. 요즘엔 모든 다리가 붕괴되고 있어요. 책도 다리라고 말할 수 있고, 예술도 다리인데, 이웃나라 마음은 알지 못해도 이야기나 그림, 춤은 쉽게 이해가 되잖아요."

그렇다, 온 세계 경제가 무너진 요즘이야말로 새 문화, 새 예술, 새 가치를 창출할 기회인 것이다. 여행을 꿈꾸듯 가볍게 다시 일어나보자.

백미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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