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섣달 그믐에 잠들면 눈썹 하얗게 샌다?

입력 2008-12-27 06:00:00

설 준비는 섣달 그믐이 돼야 마무리된다. 보름 전부터 준비해온 유과와 갖가지 강정도 정성스레 만들어 항아리에 넣어 개구쟁이들의 손이 닿지 않는 깊고 어두운 광에 갈무리해 두었다. 대엿새 전에 빼온 가래떡도 적당하게 말려서 어머니와 누이들이 떡국을 끓일 양만큼 썰어서 널따란 소쿠리에 담아 다락방에 올려놓았다.

그믐날 낮에는 작은어머니도 오셔서 어머니와 함께 부엌 한가운데 솥뚜껑을 걸쳐놓고 배추와 무 등 채소로 전을 부치고, 고기와 어물로 제수를 장만했다. 부엌 한쪽에서 누이들은 기왓장을 부순 가루를 짚에 묻혀 더러워진 놋그릇을 닦아 노랗게 반짝이도록 윤을 내야 한다. 장난기가 발동한 누이들이 기왓장 가루가 묻은 손으로 얼굴을 문질러 얼룩이 진 모습을 서로 쳐다보며 킥킥거리다가 어머니의 부지깽이 세례를 받고 부엌 바깥으로 쫓겨나기 일쑤다.

여자들이 음식준비를 하는 동안 아버지와 우리 형제는 설날부터 정월보름까지 방구들을 따뜻하게 데울 만큼 충분한 장작과 잎나무를 뒷산에서 해와 담 밑에 쌓아두어야 한다. 송아지를 낳은 암소가 포근하게 지낼 수 있도록 외양간도 말끔하게 청소한 다음 짚을 넉넉하게 깔아주고 콩깍지를 넣은 여물도 많이 준비해야 한다.

날이 저물고 저녁밥을 먹고 나면 아버지 어머니와 우리 7남매는 호롱불을 밝힌 초가삼간 단칸방에 옹기종기 모여 이불 속에 발을 넣고 둘러앉아 설빔을 꺼내 입어본다. 위로 형이 있는 나는 늘 형이 입던 옷을 물려받아야 해서 설이든 추석이든 새옷 입어볼 일이 없어 입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설빔을 입어보는 것도 지겨워질 때쯤이면 모처럼 배불리 먹은데다 낮에 뛰어다니느라 피곤한 우리는 졸음에 겨워 누이의 무릎을 베고 누워 스르르 잠이 들려고 할 때, 셋째 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겁을 준다. "너희들 알고 있니? 섣달 그믐날 밤에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센대." 그 말에 꾸벅꾸벅 졸던 넷째 누이가 화들짝 놀라 어머니께 물어본다. "엄마, 정말 그래? 거짓말이지?" 큰누이와 바느질을 하던 어머니는 그저 빙그레 웃기만 할 뿐 아무 대답이 없다. "거짓말 아니다. 한번 두고 봐라." 셋째 누이가 다시 한번 겁을 준다. 하지만 아무리 겁이 나도 어린 우리는 무거운 눈꺼풀을 이길 수 없어 그대로 잠이 든다. 울상을 짓고 끝까지 버티던 넷째 누이도 30분도 지나지 않아 별 수 없이 잠이 들고…. '이때다' 싶은 셋째 누이는 급히 부엌에 나가 낮에 전을 부치고 남은 밀가루 반죽을 가져와 잠이 든 넷째 누이의 눈썹이 하얗게 바르고는 둘째 누이와 눈을 맞춰 키득거린다. 내일 아침이면 넷째 누이는 세어 버린 눈썹을 보고 너무 놀라 울어 버릴 것이 틀림없다.

밤이 이슥해 삼태성이 이미 많이 기울고 차가운 겨울바람이 문풍지를 울리고 지나가지만 어머니와 큰누이는 아직 잠을 잘 수 없다. 단벌뿐인 아버지가 벗어 놓은 한복 바지저고리를 빨아서 다시 솜을 놓아 누비고 손으로 꿰매서 동정을 달아 내일 아침 차례 지낼 때 입도록 준비를 해야 마침내 설 준비가 끝나기 때문이다. 어쩌면 어머니는 그대로 밤을 새울지도 모를 일이다.

강영도(대구 수성구 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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