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두진의 책속 인물 읽기]우듬지가 부르는 소리-노인

입력 2008-12-24 06:00:00

'입 다정한 사람'이 마음도 따뜻할까

기요는 산골마을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소작농이었고, 아버지가 병으로 죽은 뒤 하루하루 끼니 잇기도 힘든 지경이었다. 입을 줄이기 위해 그 마을 소작농의 자식들은 어릴 때 타지로 고용살이 나가는 게 보통이었다. 열 네 살 때 기요는 도시의 유곽으로 팔려갔다.

공포와 혐오와 수치의 한 달이 지나고 나서 기요는 실수없이 몸을 파는 창녀가 됐다. 창녀가 되고 4년 동안 남녀간의 은밀한 짓이라면 속속들이 보고 들어왔지만 사랑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때 나타난 손님이 오사나이였다. 오사나이는 만주와 시베리아를 오가며 무역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행동거지가 당당하고 씀씀이가 좋았다. 그는 기요를 좋아해서 유곽에 올 때마다 기요를 지명해서 동침했다. 유곽에 올 때마다 외국에서 건너온 진기한 물건을 선물했고, 동침하지 않고 밤새 이야기만 하기도 했다. 기요는 오사나이를 사랑했다. 처음 갖는 감정이었다. 오사나이는 말했다.

"조금만 기다려 줘. 네 빚을 청산할 돈을 마련할 테니까. 그러면 우리 여기를 뜨자."

기요는 유곽에 온 지 한달 만에 말라버린 눈물을 다시 흘렸다. 그러나 모두 거짓말이었다. 오사나이는 떠돌이 방물장사였고 처자식이 딸린 남자였다. 빚 갚아 줄 돈은 고사하고 기요를 만나러 유곽에 들락거리느라 얼마 안 되는 저금마저 다 써버렸노라고 했다. 그러나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은 진심이라고 했다. 기요는 적어도 그 마음만은 믿었다.

진실로 오사나이를 사랑했던 기요는 모아두었던 돈을 헐어 스스로 화대를 지불하고 오사나이를 방으로 데려갔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돈이 바닥난 것이다.

"같이 죽자."

누가 먼저 한 말인지 모른다. 기요는 유곽을 빠져나왔다. 창녀는 외출이 금지돼 있었지만 오사나이를 행세깨나 하는 무역상으로 믿고 있던 지배인은 오사나이가 건네는 돈을 받고 외출을 허락했다. 그 돈은 기요가 마지막 남은 돈을 긁어모은 것이었다.

두 사람은 명소를 여행했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온천욕도 즐겼다. 그러나 결국 돈이 다 떨어졌고 하루를 더 묵을 돈도 없었다. 유곽에서는 기요를 찾기 위해 사람을 풀어놓았을 것이다. 두 사람은 커다란 녹나무 아래에서 함께 죽기로 하고 준비한 청산가리를 갖고 녹나무 아래로 갔다.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최고급 술을 마시자.'

오사나이는 술을 사오겠다며 떠났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았다. 어쩌면 오사나이에게는 애초부터 죽어야 할 이유가 없었는지도 몰랐다. 기요는 무서운 밤 홀로 청산가리를 먹었다.

오십 년이 흘러, 그 녹나무 아래에서 남자 친구를 기다리던 게이코는 그 자리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노파를 본다. 이윽고 남편이라는 노인이 노파를 데리러 온다. 노인은 아내가 2년 전 치매에 걸린 후부터 이곳 녹나무 아래로 와 서 있는다고 했다. 깊은 밤, 인적 없는 녹나무 아래 젊은 게이코를 혼자 두고 떠나기 민망했던 노인은 게이코의 남자친구를 함께 기다리며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내를 만난 곳이 여기 녹나무 아래라오. 그럭저럭 오십 년이 되려나."

그는 자신의 아내가 된 여자(기요)가 청산가리를 먹고 녹나무 아래 쓰러진 것을 발견했다. 깜짝 놀라 들쳐업고 병원으로 뛰어갔다.

"한때는 의사도 포기했는데, 어떻게 운이 닿았는지…."

노인은 '어떻게 운이 닿았는지'라고 짧게 말했지만, 사실은 온갖 위기를 극복하고, 온갖 애정을 쏟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청산가리 먹은 사람을, 의사도 포기한 사람을 살려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지극정성으로 간병을 하다 함께 살게된 것이리라. 그러나 노인은 청산가리를 먹고 쓰러진 기요를 어떻게 구했는지 구구절절 말하지 않았다. 또 아내(기요)가 무슨 이유로 녹나무 아래에서 자살을 꾀했는지, 이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 묻지 않았다. 치매에 걸린 아내가 이전엔 발길을 두지 않던 녹나무 아래로 가는 이유를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노인은 그저 정신을 잃은 아내를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볼 뿐이었다.

자신의 공을 구구절절 말하지 않는 사람, 눈물 글썽이며 신산한 삶을 주절거리지 않는 사람, 타인(상대가 아내라고 할 지라도)이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을 굳이 묻지 않는 사람…. 따뜻함, 진정성이란 그런 사람에게 어울리는 말일 것이다. '입 다정한 사람' 치고 '마음 따뜻한 사람'은 드물다. 입 다정했던 오사나이가 도망쳐서 돌아오지 않았듯. '우듬지가 부르는 소리'는 일본작가 오기와라 히로시의 연작소설 '천년수' 중 한 편이다.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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