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와 대화] 일흔에 첫 소설집 낸 시인 임재훈

입력 2008-12-20 06:00:00

노인의 입장에서 노인문제 그려봤죠

소설가이자 시인인 임제훈씨가 일흔 나이에 첫 소설집 '아내의 환상'을 출간했다. 그는 2001년 '한국시' 7월호에 시 '자개농' '소원' 등이 당선됐고 2005년 '시사문단' 5월호에 소설 '아내의 환상'이 당선됐다. 시인으로든 소설가로든 늦게 등단한 셈이다.

청년들에게도 소설쓰기는 만만치 않다. 작품성을 떠나 소설 한편을 완성한다는 것 자체가 힘들다. 시간과 근성이 있어야 하고, 건강도 좋아야 한다. 무엇보다 생각이 생기발랄, 천방지축 마구 솟아나야 한다. 게다가 그 생각들이 쓸모 있는 것들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원고지 10장을 채우기도 어렵다. 젊은 시절 왕성하게 창작하던 작가들도 나이 들면서 활동이 뜸해지는 것은 기교가 없어서가 아니라 새로운 감성이 솟아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임제훈은 연대기적 나이와 무관하게 문학청년이었다.

"대학(경희대) 다니던 시절 겨울방학 때 '잃어버린 태양'이라는 제목의 1천200매짜리 장편소설을 써서 정비석 선생한테 보냈어요. 몇 달 후 원고지 석 장에 이런저런 소감을 써서 보내주셨더군요. 삼류잡지에라도 제 글을 실을 수 없을까요, 했더니 '삼류잡지 운운하려면 글쓰기는 치워라'고 하시더군요."

말하자면 임제훈은 진작부터 소설을 마음에 품고 살았던 문청이었다. 그는 늘 소설을 마음에 품고 살았지만 생활에 쫓기느라 거의 포기하고 지냈다고 했다. 나이가 많아 힘들지 않으냐는 물음에 "일찌감치 데뷔한 문인들은 날개를 접고 회상에 젖을 때지만 나는 아직 해놓은 게 없고 열정은 그대로고 건강에도 자신이 있어 엉뚱하게 날뛰고 있다"고 답했다. 중·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오래 생활했고 이제는 퇴직해 시간도 많다고 덧붙였다.

"1999년 10월 10일 '제일서적'에서 '현대시학'이란 시 월간지를 샀어요. 집에 와서 보니 뒤편에 대학동기로 시인이면서 광주대학 교수였던 조태일이 죽었다고 나왔습디다. 많이 울었습니다. 태일이가 내게 영감을 주었는지 시상이 마구 떠오릅디다. 지금까지 시상은 샘솟고 있습니다."

그는 써놓은 작품도 많고 출간을 기다리는 작품도 있다고 했다.

"180쪽짜리 시집 원고 8권 분량과 소설집 한권 정도 분량이 더 있습니다. 출판비가 만만찮아 가끔 복권도 사 봅니다만 서툰 작품으로 사회에 활자 공해가 되지 않을까 싶어 망설이고 있습니다."

임제훈의 소설은 생활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그가 취하는 소재는 우리 주변의 사람들, 절박한 사연들이 대부분이다. 죽어가는 홀어머니, 홀아버지와 외아들 혹은 외딸의 절박한 사정, 치매에 걸린 안사돈을 보살피는 여든의 바깥사돈, 나병에 시달리는 딸과 아버지의 고통, 사촌간의 재산 갈등, 고시 낙방생, 육이오 당시 보도연맹, 황혼 결혼 등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소재들이다.

'아내의 환상'에서 김 노인은 치매에 걸린 안사돈 천 여사를 보살핀다. 안사돈을 벌거벗기고 목욕까지 시켜준다. 똥오줌을 받아내고 젖무덤과 샅도 씻어준다. 가자는 대로 업고 안고 다녀 줄 테니 죽지 말고 살아만 달라고 빌기도 한다. 그리고 꼭 껴안고 함께 잠도 잔다. 아들과 며느리도 그 상황을 생활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 작품에는 '관계의 경계'가 무너지거나 혹은 희미해져 있다.

"이런 상황은 절박한 사회적 문제입니다. 치매 노인을 어떻게 할 것이냐? 벌거벗고 목욕하다가 강물에 떠내려가는 제수씨를 그냥 보고 있을 것인가? 벌거벗은 채 뛰어 들어 건져야 하는가…."

사실 임제훈이 던지는 질문은 우리 사회에 상존하는 문제지만 누구도 질문하지 않고 답하지 않는다. 마주서고 싶지 않은 문제이기에 외면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꼭 치매나 익사 등의 문제뿐만 아니라 사람이기에 어려운 '관계문제'가 언제나 존재한다.

임제훈은 시종 겸손했다. 인터뷰 요청에도 '제가 아직 서툴러서…'라고 말끝을 흐리기도 했다. 등단이 늦었을 뿐 인생의 경험과 소설을 공부한 세월을 고려하면 그는 결코 '문단의 말석'에 앉을 사람은 아닌데 말이다. 20대에 덜컥 등단했다가 사라지는 많은 작가들을 고려하면 경험을 두루 쌓고 하고 싶은 말을 오랜 세월 '쟁여놓았던' 노 작가의 등장은 반갑기까지 하다.

임제훈의 문체는 유려하고 부드럽다. 그는 '과찬이다'며 좋은 문체, 부드럽고 안온한 문체를 쓰기 위해 노력하지만 생각처럼 잘 되지 않는다고 했다. 작가 이문열의 문장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그는 소설은 재미있어야 한다고 했다.

"내가 구식인지 모르겠지만 재미없는 것을 누가 읽겠는가. 읽히지 않을 것이라면 구태여 쓰고 인쇄할 필요 없이 혼자 중얼거리고 마는 게 낫다." 이른바 관념 소설, 서사 없는 소설, '소설가 소설'이 범람하는 요즘 분위기에서 임제훈은 '정통소설가'인 셈이다.

임제훈은 소설 이전에 시로 등단했고, 서예작품으로 등단한 바 있다. 또 수필 전문지 '문장'을 통해 수필가로도 등단한 사람이다. 여러 방면의 글쓰기에 대해 그는 "마음과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으니 여러 장르로 옮겨 본 것이다.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는 일이 많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아무래도 나이와 연륜 탓일 것이다. 임제훈 소설의 색깔은 젊은이의 '원색'이 아니라 나이 지긋한 사람의 '회색빛'이 묻어있다. 우리사회이 중요한 이슈가 되고 있는 노인 문제, 핵가족의 문제를 젊은이의 시각이 아닌 당사자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보기 드문 작품들이다. 예컨대 지금까지 치매노인을 소재로 한 소설은 많지만 대부분 그 노인을 보살피는 젊은 가족입장에서 서술되고 있었다. 그러나 임제훈은 치매노인 당사자의 입장에 이야기하고 있다.

이전에 가수 장사익은 기자와 만나 '나이 40에는 40먹은 남자의 노래를 했고, 50에는 50먹은 남자의 노래를 했다. 60, 70이 되면 그 노인의 노래를 할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제 70대 소설가 임제훈이 '70 노인의 이야기'를 들려줄 테니 우리문학도 그만큼 풍요로울 것이다.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임제훈=1939년 10월생. 경희대, 명지대, 계명대 교육대학원 졸업. 고교 국어교사 퇴직. 2001년 '한국시' 7월호 시 '자개농' 당선, 2005년 '시사문단' 5월호 소설 '아내의 환상' 당선, 2006년 '문학세계' 10월호 시 '설탕꽃' 당선, 2007년 '문장' 가을호 수필 '하루살이' '귀면각' 당선. 시집 '조용한 새벽' '바람꽃'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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