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4대 일가의 어머니

입력 2008-12-18 14:44:41

경북 봉화군 법전리. 가난한 농부의 아내는 둘째 딸 혼사를 앞두고 가정형편이 여의치 않자 이웃집 과수원에서 낙과를 주워 모아 읍내 장터에 내다 팔아 딸 혼수품으로 놋쇠요강과 놋그릇 하나씩를 사고 돌아오는 길. 때를 놓쳐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길가 텃밭에서 무를 뽑아 먹은 어머니는 그 날 저녁 심한 배앓이로 며칠간 산고 이상의 고통을 겪는다.

#한 동네에 살던 큰 댁 시조모가 오랜 병환으로 등창이 생기자 시백모는 등창 고름을 닦아낸 헝겊을 빨라며 작은 집 며느리에게 내민다. 때는 한 겨울. 시린 손은 고사하고 두꺼운 개울얼음을 깨고 빨래를 해야 한다. 이 때 며느리의 시어머니는 "아가! 내가 하마"며 당신이 몸소 무거운 빨래짐을 이고 휑하니 사립문을 나선다.

지나온 이야기를 하던 둘째 딸 류기자(69)씨와 맏며느리 김갑연(71)씨는 어머니이자 시어머니의 마른 손을 꼭 부여잡으며 말끝을 흐렸다.

"저거가 잘했지. 내가 한 게 뭐가 있다고. 가난한 농사꾼 집에 태어나 부모가 해준 거라곤 이름 석자 달아준 것밖에 없지. 제대로 먹이지도 못했는데 그래도 잘 커줘서 항상 고마울 뿐이지." 7남매를 낳아 키우며 어느 집보다 형제간에 우애 있고 고부간 정이 남다른 집안으로 일궈낸 올해 아흔 두 살의 김화욱씨. 그는 4대 90명에 이르는 대가족의 최고어른이다.

16살의 꽃다운 나이에 안동에서 봉화군으로 시집와 76년 세월을 오직 가족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으로 일관한 김씨는 아흔을 넘긴 나이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시력, 청력, 기억력 등이 젊은이 못지않다.

"당신은 굶더라도 자식들 입에는 하나라도 더 먹이려고 늘 노심초사하며 살아오셨죠. 그러면서도 제게는 자상하기 그지없이 대해주셨습니다. 제 자신이 모자라 저의 며느리들에게 어머님의 사랑만큼 못해주는 게 안타깝죠." 며느리의 말에 김씨는 "농사지으면서 고생만 시켜 볼 때마다 짠한 마음이 든다"며 재차 손사래를 쳤다.

이에 딸인 류씨도 "언제나 한결같이 당신보다는 자식을 먼저 생각했고 온갖 궂은일과 고생은 당신이 짊어지려고 했다"고 거들었다. 그 시절 우리네 어머니들이 모두 그렇듯 넉넉하지 못한 형편에 그나마 자식들에게 줄 수 있는 거라곤 퍼내도 퍼내도 줄지 않는 모성애뿐이었다.

"제게 시어머니는 영원히 잊지 못할 어머님이시죠. 저도 자식을 5남매 두었지만 어머님처럼 지극한 자식사랑은 자신이 없어요." 일흔을 넘긴 며느리의 말에 옆에 있던 일흔을 바라보는 딸도 고개를 끄덕였다.

김씨가 봉화에서 나와 대구시 동구 불로동에 산 지는 6년 남짓. 그는 대구에 와서도 몸을 아끼지 않고 손자와 증손자, 증손녀를 돌봤다. 힘든 세월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낙천적 성격의 김씨 덕에 맏손자 류상원(43)씨네 집안은 늘 화기애애했다.

손녀 류영조(47)씨는 "늘 좋은 모습만을 봐와서 그런지 어릴 적부터 할머니 그늘은 그저 한없이 편안하기만 한 것으로 기억납니다. 지금도 3대 손자손녀는 물론 4대 증손자 증손녀들의 생일과 태어난 시간까지 죄다 외고 계시는 걸 보면 놀랄 따름이죠."라고 말했다.

김씨는 신식교육을 배우진 못했지만 집에서 깨친 한글로 쓴 사돈지(신부 어머니가 딸 시집보낼 때 신랑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를 잘 쓰기로도 정평이 나 있다. 명절이면 가족끼리 둘러 앉아 김씨는 당신이 쓴 사돈지를 가족들에게 낭랑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게 즐거움이다.

손자 류선양(40)씨는 "그럴 때면 모두들 할머닌 글 솜씨에 탄복을 한다"며 "언제 들어도 지겹지 않다"고 거들었다. 김씨의 이런 글쓰기는 며느리에게도 전해져 식구들이나 사위들에게 말보다는 짧은 글이지만 편지를 자주 쓴다. 말보다 사랑이 듬뿍 담기 편지글이 가족의 사람을 확인하는 최고의 메시지임을 더할 나위가 없는 셈이다.

남편과 맏아들은 환갑을 지내지 못하고 세상을 떴지만 며느리와 함께 농사를 지으며 현재의 식구들을 건강하고 밝은 사람으로 자라나게 한 건 모두 어머니로서 김씨의 공덕이라는 데 가족 모두는 깊은 동감을 표한다. 한달 전 경로당에서 귀가하다 낙상을 해 병원에 입원 중인 김씨를 위문한 가족들의 이야기는 세대를 넘은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고마움으로 온 병실에 메아리치고 있다.

우문기기자 pody2@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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