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통해 지구온난화에 대한 폐해를 본적이 있다. 컴퓨터의 도움을 받은 그래픽화면에서는 현장감 넘치는 생생함으로 해수면 상승의 결과를 예측하기도 한다. 한번은 조금 귀에 거슬리는 소프라노 톤을 가진 여자 진행자가 그린랜드의 빙하 두께가 매년 2m씩 얇아지고 있으며, 이 때문에 1년에 500억t 이상의 물이 바다로 흘러 해수면이 0.13㎜씩 상승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없어질 남태평양의 섬나라, 사라질 산들을 3D 입체화면으로 섬뜩할 만큼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이 프로를 보면서 '안 그래도 눈이 귀한 대구서는 머지않아 눈 구경을 못하겠구나' 라는 생각을 봤다.
그런데 낮은 하늘에 덮여 있는 회색 도시의 아침은 눈을 기대하기에 충분했다. 이런 날은 오십을 바라보는 무딘 감성의 대한민국 아줌마 가슴조차 설레게 하는 애절한 사연이 숨겨둔 보석마냥 은밀히 떠오른다.
빛바랜 일기장을 펼치듯 오랜만에 브람스교향곡 3번 3악장의 CD를 걸어본다. 불란서 영화 배경처럼 흐린 날이나 와인이 지독히 혀끝에 감미로운 날에 간혹 듣는 음악이다. 음악적 소양이 평균함량에 미달하는 나로서 이 음악이 눈과 정취가 어울리는 지는 모른다. 하지만 눈 오는 날이면 클라라 슈만을 향한 일생의 로망을 가진 브람스를 떠올리며 이 음악을 듣곤 했다.
무명의 신인 피아니스트였던 브람스는 스무 살 때 뒤셀도르프의 슈만 집에서 서른네살의 클라라를 운명적으로 만난다. 당시 클라라는 여성으로서의 매력이 정점이었던 터라 젊은 브람스가 그녀의 뛰어난 미모와 재능에 매력을 느꼈음은 숙명에 가까운 일이었다. '저렇게 많은 별들 중에 내가 쳐다본 별이며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 그 별 하나'를 발견 셈이니 가히 마법과 같은 사랑을 만난 것이다.
젊은 시절의 열정적인 사랑은 슈만이 죽은 후 침착하나 더욱 깊이 있는 사랑의 공감으로 변해갔고, 오히려 그의 정열은 차분히 가라앉아 예술적 영감으로 승화돼 갔다. 일생을 그녀의 주변에서 여러 가지 빛깔의 사랑으로 채색한 브람스는 클라라가 죽은 후 마치 '나비와 꽃송이 되어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듯 "나의 삶의 가장 아름다운 체험이요, 가장 위대한 자산이며, 가장 고귀한 의미를 상실했다"고 그녀의 죽음을 요약했다.
브람스 교향곡을 들으면서 이런 저런 상념에 젖어 멍하니 바라본 전망창 너머에는 어느새 눈발이 흩뿌리고 있다. 기대하지 않은 행운권에 당첨된 것 마냥 기분이 황홀하다.
아직도 '내가 눈을 계속 보려면, 내가 계속 브람스를 들으려면….'환청처럼 나의 귓전을 맴돈다.
TV에서는 여자 진행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합성세제의 사용을 줄이고 천연세제나 비누를 사용하세요. 냉장고 자주 열지 마세요. 뜨거운 물 사용 줄이세요…."
그래 맞다. 문득 나는 결심해본다. 합성세제를 적게 사용하고, 냉장고 문 적게 열 것이며, 반신욕도 안할 것이다. 그래야 하얀 눈을 오래 오래 보면서 맘속의 브람스를 좋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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