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모 생각] 한 식구로 살아가기

입력 2008-12-16 06:00:00

좀처럼 볼 수 없었던 함박눈이 내려 기분이 한껏 들떠 있었던 날 저녁이었다. 은근히 꽃이라도 한송이 사들고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자정이 다 돼 퇴근한 남편은 자못 심각한 얼굴로 "나는 식구가 아닌 것 같아"라고 했다.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라 순간 당황했다. '식구가 아니라니'. "왜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며칠 전 남편은 잘 아는 어른과 식사를 같이 했는데 그곳에서 그 어른은 "자넨 식구에 속하는가?"라고 물어보았다고 했다. 그 분은 "식구란 한 집에서 함께 살면서 끼니를 함께하는 사람이며 바쁘다는 핑계로 가족이 다 모여서 식사를 하지 않는다면 식구의 자격이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에 남편은 자못 신경이 쓰인 모양이었다.

우리 집의 경우 서로 출근하기 바쁘고 아이들 역시 학교 가느라 바빠 늘 시간에 쫓기는 편이다. 어른 말씀을 되새겨 보니 식사는 배고픔을 이기기 위해 끼니를 때우는 것만이 아닌 이를 매개로 가족간의 소통 및 결속을 위한 것이며 우리의 따뜻한 문화의 하나라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옛날 친정집의 식사가 생각났다. 친정집은 할머니를 비롯해 부모님과 5형제가 조그만 방에 다같이 모여 머리를 맞대고 식사를 했다. 어쩌다 맛있는 고기반찬이 나오면 형제끼리 서로 먹으려고 쟁탈전을 벌이고 그러면 아버지는 큰기침 한번 하고는 고기를 뚝 덜어서 우리 형제의 밥그릇에 슬쩍 올려주셨다. "너거들 별일 없제?"라고 우리의 일상사를 물어보면서 말이다.

좀 맛있는 것은 주로 어수룩한 막내에게 잘 건네곤 했는데 그때 장난기가 발동한 남동생이 갑자기 큰 소리로 다른 곳을 가리키며 "저거 뭐야"라고 하면 막내는 그쪽을 순진하게 쳐다보고 그러는 사이 반찬은 온데간데없어진 기억이 있다. 추억의 한 장면이지만 어제의 일처럼 생생한 식구들 모습이다. 아마 그런 모습이 식구의 전형이 아닐까. 지금도 간혹 TV드라마에서 오순도순 살아가는 집 분위기를 나타낼 때는 그때의 장면이 떠오른다.

얼마 전 군 복무 중인 아들 면회를 갔다온 친구가 "처음 만나 몇 마디 하고 나니 할말이 없더라"는 우스갯소리를 한 적이 있다. 이맘때면 송년회를 하는 시기다. 송연회도 식구의 개념이 도입된 것 같다. 같이 일하는 동료들은 한지붕 아래 한솥밥을 먹으며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또 다른 식구들이다. "우리가 남이가, 한솥밥 함께 먹으니 한식구지"하던 동료의 말처럼 말이다.

맞벌이를 하는 경우엔 집에서 식사 준비하기가 부담스럽다. 그럴 땐 정기적으로 외식을 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가족이 밥을 같이 먹으면 그 또한 식구라 생각한다. 한 달에 한 번이라도 날을 정해 단골집을 만들어 놓고 정답게 식사를 하면서 얘기를 나누면 나중에 애들이 다 자랐을 때 좋은 추억이 되리라.

수험생들이 수능통지표를 받아들었다. 이제 마음이 더 바빠질 것이다. 하지만 애들이 집 떠나기 전에 진정한 식구의 의미를 되새기며 함께 따뜻한 밥을 자주 먹기를 기대해 본다. 혹시 집 떠나 멀리 있어도 힘들 때 생각하면 힘이 솟는 식탁이 되었으면 한다.

정명희(민사고 1학년 송민재 어머니)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