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1천원이면 난방 충분
◆전성기
'…방구들 선득선득 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조선 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연탄차가 부릉 부릉/힘쓰며 언덕길 오르는 거라네/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온몸으로 사랑하고 나면/한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장도 되지 못하였지….'
1981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안도현 시인의 '연탄 한 장'에 나오는 시구다. 그때 그 시절 연탄 한장은 온 가족의 따뜻한 밤을 지켜내고, 끼니를 챙겨주던 소중한 존재. 비단 시인뿐 아니라 1970,8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누구나 연탄에 얽힌 추억 하나쯤 간직하기 마련이다. 저녁 무렵 매듭 꼰 새끼에 두어장씩 연탄을 끼워 들고 봉지 쌀과 함께 집으로 향하던 아버지, 새벽녘 싸늘해진 방 기운에 잠이 깰 무렵 꺼진 연탄불을 살리기 위해 연기와 씨름하던 어머니….
착화탄이 나오기 전까지 어쩌다 연탄불을 꺼뜨린 아낙네들은 이웃집에 새 연탄 하나 들고 가 "조금이라도 불씨가 남은 연탄으로 바꿔달라"고 사정했고, 시장통엔 가게 연탄불만 전문적으로 붙여주는 아저씨까지 있었다. 어디 그뿐이랴. 퇴근길에 출출해진 어른들은 연탄 화덕에 쥐치포'오징어를 구워내며 막걸리를 들이켰고, 그 옆 한 쪽엔 덩어리 설탕을 담은 국자를 연탄 화덕 위에 올려놓고 소다를 섞어 보글보글 녹여가며 부풀려 먹던 어린 시절의 '내'가 있었다.
◆부활
"처음엔 기름값이나 아껴볼 요량이었는데, 막상 들여놓고 보니 이런 보물단지가 따로 없는 것 같아요" 박기용(61'대구 동구 효목동)씨네 거실에 들어서면 어린 시절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연탄 난로와 연통이 반갑다. 멸치 다시물을 우려내던 아내 김화순(58)씨는 "김장 찹쌀풀로 쓸 물이에요. 연탄 난로는 화력이 일정하기 때문에 은은하고 깊은맛을 내는데 제격이다"고 말했다.
부부가 연탄 난로를 들인 건 벌써 3년 전. 치솟는 기름값을 감당하다 못해 거실만이라도 연탄 난방으로 바꾸자고 생각한 것. "연탄이 싸기는 정말 쌉니다. 기름(등유)으로만 겨울을 나려면 3,4드럼은 족히 써야 하는데 드럼당 가격이 20만원을 훨씬 넘죠. 하지만 거실 난방을 연탄으로 바꾸고 나서는 2드럼 값으로 따뜻한 겨울을 보낼 수 있게 됐어요." 박씨는 "350원짜리 연탄 2,3장이면 하루가 거뜬하기 때문에 300장(10만원) 안팎이면 거실 난방비로 충분하다"고 했다.
이 집 연탄난로는 단순히 기름값을 아끼는데 그치지 않는다. 차를 끓이고, 고구마와 밤을 구워 먹는데도 그만이라는 것. 저녁 때 온 가족이 둘러앉아 밤을 까 먹고, 오순도순 얘기 나누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단다. 3년째 연탄난로를 쓰다 보니 요령도 생겼다. "오래 사용하려면 함석(양철)보다 스테인리스 난로가 좋아요. 싼 맛에 함석 난로를 샀는데 1년도 못 가더라고요." 박씨 부부는 "겨울에 땔 연탄은 여름에 미리 사두는 게 좋다"며 "갓 찍어낸 연탄보다 냄새가 훨씬 덜하고 잘 꺼지지도 않는다"고 환히 웃었다.
추억 속 연탄이 현실로 돌아왔다. 불황과 유가 폭등 때문이다. 단돈 1천원(연탄 2,3장 값)이면 하루를 따뜻하게 날 수 있는 까닭에 서민 연탄 수요가 또 다시 급증하고 있는 것. 단독주택과 식당마다 연탄이 수북이 쌓여가고, 화훼단지나 공장 작업장에선 연탄 난로 및 보일러 공사가 봇물을 이룬다.
연탄의 전성기는 1970,80년대였다. 80년대까지만 해도 국내 난방 수단의 80%가 연탄이었고, 연탄 소비량이 사상 최대였던 85년엔 대구 소비량만 150만t에 육박했을 정도. 하지만 88년 서울올림픽 이후 석유와 도시가스에 밀리기 시작한 대구의 연탄 소비량은 IMF 때 잠시 증가한 것을 제외하면 추락을 거듭했고, 2002년 들어 사상 최저점(3만4천t)을 찍는다. 그 사이 180곳에 달했던 국내 연탄공장 수가 49곳으로 줄었고, 450개 안팎의 대구 연탄판매소 또한 30개 남짓만 겨우 살아 남아 한 동네에 하나 찾기도 힘들어졌다.
이처럼 추락을 거듭하며 추억 속으로 사라져 가던 연탄이 우리 곁으로 다시 돌아온 건 유가가 폭등하기 시작한 2003년 무렵이다. 그해 대구 연탄 소비량은 4만1천t을 기록, 마침내 상승세로 돌아서고, 급기야 2006년엔 15만8천t까지 급증해 2002년의 5배 가까운 놀라운 수치를 기록했다. 이 때쯤 연탄보일러를 기름보일러 옆에 함께 단 주부 강경숙(39)씨는 "화장실이나 부엌에선 기름보일러, 거실이나 방을 데울 땐 연탄보일러를 쓴다"며 "보일러를 다는데 40만원이 들었지만 해마다 그만큼의 기름값을 아끼고 있다"고 귀띔했다.
유난히 따뜻했던 지난 겨울 15만t까지 떨어졌던 연탄소비량은 IMF 버금가는 경제 위기와 끝없는 유가 폭등으로 말미암아 다시 반전됐다. 대구연료조합 이기호 상무는 "기름값이 치솟던 봄부터 연탄 난로 및 보일러 공사가 봇물을 이뤄 올 전체 연탄 소비량은 지난해 대비 15~20%가량 늘어난 17~18t으로 전망된다"며 "날씨가 변수지만 국제 원자재 값이 내려가고 경제 사정이 나아지지 않는 한 앞으로도 계속 연탄 소비량이 늘어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내다봤다.
이상준기자 all4you@msnet.co.kr
사진 정재호기자 new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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