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도심 재창조] ⑧골목이 경쟁력이다(중)
대구 도심에는 골목이 1천개가 넘는다. 그 많은 골목들마다 각각의 색깔과 이미지, 이야기가 숨어 있다. 100년 전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역사까지도 고스란히 품고 있다. 골목을 살려내 도심에 새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서는 골목마다 숨겨진 정체성을 끄집어내야 한다. 도시계획 전문가에서부터 인문학자, 건축가, 예술가, 공무원까지 대구 도심재창조의 핵심으로 골목을 지목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골목의 어떤 특성을 살려내고 어떻게 새로 덧입혀야 할지가 중요하다. 그러나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하는 것은 골목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골목의 주인은 주민
동성로와 중앙로 사이 한 골목에서 옷가게를 하는 박재현(38)씨는 지난 10월 자신이 디자인한 골목 디자인 도안을 중구청에 가져 갔다. 자신의 점포가 있는 골목을 '향수가 녹아있는 철길'로 바꾸면 어떨까 하며 스스로 작업한 것이었다. 도안을 살펴본 중구청 관계자들은 흔쾌히 채택했다. "아주 독특하고 신선한 발상"이라는 이유였다.
박씨는 "발길이 끊긴 골목을 살리기 위해 이웃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며 "골목 주민들의 염원을 구청에서 받아들여 공공미술까지 입혀준다고 하니 골목에 활기가 넘치는 건 시간 문제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구청 측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골목을 스스로 디자인하고 주민들의 동의서까지 받아 온 것은 처음있는 일"이라며 "도안도 매력적이어서 적극 지원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골목의 주인은 주민이다. 골목 재생의 핵심은 골목 안의 목소리에 얼마나 귀를 기울이느냐에 달렸다. 전문가집단이나 관(官) 주도로 진행되는 각종 사업들이 성과를 제대로 내지 못하는 이면에는 주민 생각과 일치하지 않는 데 있다.
지난달 27일 오전 중구 성내2동 주민센터 2층 회의실. 매일신문 도심재창조 취재팀은 '종로골목을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지'에 대해 주민들의 생각을 직접 듣는 시간을 가졌다.
주민들은 종로의 가능성을 모두 인정했다. 예전 대구 도심의 축이면서 중국 화교의 정착지이자 요정 골목으로 크게 번화했다가 쇠퇴 일로에 접어든 종로. 하지만 최근 2년 사이 다기, 천연염색, 골동품, 고가구 상점들이 줄줄이 들어서면서 '대구의 인사동'이라고 불릴 정도로 유명세를 키워가고 있다. 여기에 현대백화점 공사로 밀려난 떡전골목의 떡가게들이 하나 둘 이전하면서 대구의 역사와 전통이 버무려진 거리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골목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이유
"종로골목 상가의 간판을 어떻게 바꾸고, 거리나 도로를 어떤 디자인으로 포장하고, 공공시설물을 어떻게 설치할지는 가장 나중에 검토할 일입니다. 외관이 아름답고 독특한 거리 조성도 좋지만 공연히 월세, 전셋값만 뛰어 우리들은 다른 곳으로 떠나야 할지도 모르니까요."
겉모양만 번듯하게 만드는 골목 사업은 실패로 끝날 것이라는 결론이 분명해 보이는 이야기다. 행정기관이 의욕만 부린다고 해서 현실이 개선되는 건 아니다. 예상 못한 '골목 재생 아이디어'는 봇물처럼 쏟아졌다.
"종로골목은 오로지 상권 위주로 돼 있습니다. 만나고 앉아서 쉬는 공간이 없습니다. 전통공연, 축제, 바자회 등은 우리 상인들 스스로 기획하겠습니다. 대구시나 중구에서는 사람들이 만날 수 있는 기회와 공간을 마련해 주세요. 오고 싶은 욕구가 생겨야 골목의 변화도 빠를 테니까요."(명전 신정희 대표)
"대구에서 일어나는 각종 모임의 절반을 이곳에 유치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대구 인구의 절반이 여성입니다. 북구 팔달교 인근의 '여성회관'을 이곳으로 옮길 수만 있다면 대구의 여성 모임의 핵심은 종로가 됩니다. 인근 약전골목과의 연계도 반드시 필요합니다."(하오명씨)
주민들은 행정 지원도 중요하지만 주민들이 결집하는 게 우선이라고 입을 모았다. 축제의 필요성과 시기, 다른 업종의 유입 방지를 위한 제도의 필요성, 종로골목 관광·마케팅·공예·한약 알리미를 만드는 등의 이야기도 꺼냈다. 모두 새롭고 신선한 생각들이었다.
토론을 지켜본 중구청 관계자는 "종로가 옛 추억에만 머물 것인지 과거의 영광을 찾을 것인지는 주민들의 생각을 어떻게 현실에 옮기느냐에 달린 것 같다"며 "골목 부흥은 지금부터 시작되는 셈"이라고 말했다.
◆골목 재생은 주민들의 의지에 달렸다
중구청은 지난해부터 불법 쓰레기 투기지역에 화단 조성 사업을 벌이고 있지만 어려움을 겪고 있다. 놀려둔 땅에 사업비를 들여 꾸미려 해도 주인들의 반대가 심하기 때문이다. "더럽건 말건 내 땅에 손대지 마라"는 고집에 지금까지 대상지 215곳 가운데 겨우 8곳에만 화단을 만들었다.
대구시가 '보행 천국'을 약속하며 수년 전 화강석 바닥으로 교체한 약전골목. 많은 사업비가 투입됐지만 골목은 황량함이 더 크게 다가왔다. 풀들이 말라 비틀어진 화단 위에 주차한 차량도 여럿 보였다. 조금만 뒷골목으로 들어가면 낙엽과 쓰레기가 수북하게 쌓여 있다. 내집앞 쓸기는커녕 동주민센터나 구청에 전화를 해 "도대체 뭘 하고 있느냐"고 화를 내는 게 요즘 풍경이다.
중구청은 약령골목 일대 상가에 기와지붕을 올리고, 내부가 보이는 유리셔터를 만들고, 청사초롱을 달아 새롭게 디자인하는 계획을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주민들의 의지가 없으면 성공은 결코 기대할 수 없다.
골목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주민들 스스로 골목의 독특한 배경과 역사를 찾고 아이디어를 내는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수시로 주민들을 모으고 구심점이 되는 실행기구나 조직을 짜야 한다.
다행히 도심 골목 곳곳에는 각종 모임과 협회가 적잖게 구성돼 있다. 스스로 골목지킴이를 자부하는 이들도 많다. 골목 내부의 힘을 결집시키는 건 주민들의 몫이다. 행정당국 역시 그럴싸한 계획만 내세운 뒤 공청회 한두 번으로 끝낼 게 아니라 주민들과의 소통을 넓히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특별취재팀 김재경·서상현기자 사진·이채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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