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을 좋아하지 않더라도 살다 보면 한 잔 생각이 날때가 있다. 요즘같이 바람에 떨어진 낙엽이 쓸쓸히 거리를 뒹굴 때는 마음이 허전해서, 비 오는 궂은 날은 그냥 집에 가기가 섭섭해서, 한 해가 저물어가면 또 세월만 축냈다는 아쉬움이 밀려 올때 한 잔 술로 달래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 아닐까.
힘든 하루 막걸리 한잔으로 피로를 풀고 옆사람과 안주를 나눠 먹던 대폿집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는 대표적인 것 중 하나다. 대포는 큰 술잔을 뜻한다. 대폿집은 큰 잔으로 술을 전문으로 파는 술집을 말하는 용어다. '대포 한잔 하자'라는 말이 일상화되면서 대포는 술 자체를 의미하는 말이 됐다. 심지어는 '대포'라는 이름의 술까지 등장했다.
1980년대까지 대구에는 대폿집이 많았다. 막걸리를 집이 몰려 있던 대구백화점 인근과 향촌동에 가면 어김없이 구성진 노래소리와 괜시리 상에 곰보자국만을 가득 남긴 쇠젓가락 장단이 일상적인 풍경처럼 흘러 나왔다.
93년 소풍 끝내고 하늘로 돌아간 시인 천상병은 '막걸리'라는 시를 통해 '나는 술을 좋아하되/막걸리와 맥주밖에 못 마신다/막걸리는/아침에 한 병 사면/한 홉짜리 작은 잔으로/생각날 때만 마시니/거의 하루 종일이 간다/맥주는/어쩌다 원고료를 받으면/오백원짜리 한 잔만 하는데/마누라는/몇 달에 한 번 마시는 이것도 마다한다/~ 중략~ /막걸리는 술이 아니고/밥이나 마찬가지다/밥일 뿐 아니라/즐거움을 더해주는/하나님의 은총인 것이다'라고 노래했다. 암울했던 시절, 막걸리는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주는 술의 대표주자였다. 사람들은 한 잔의 막걸리에 사랑을 담고, 독재정권 타도의 꿈을 키웠다.
빈약한 주머니 사정 탓에 넉넉하게 나오는 기본 안주는 주린 배를 채우는 좋은 수단이었다. 술을 마시지 않고 안주만 먹는 것은 암묵적으로 금기된 행동이었다. 어쩌다 용돈이나 월급을 받은 날이면 안주가 푸짐해진다. 고갈비 하나를 주문하면 그 날은 술발이 잘 받았다.
'곡주사', '남산동 도로묵', '행복식당' 등은 대구를 대표하는 대폿집이다. 중구 덕산동 염매시장 뒷골목에 자리 잡은 '곡주사'는 1970~80년대 운동권의 추억이 서린 곳. 원래 상호는 성주식당이었으나 학생들이 지어준 '곡주사(哭酒士·유신을 통곡하고 저주하는 선비들의 모임)'로 이름을 아예 바꿨다.
지난해 6월 운동권 출신 단골들이 20여년 만에 곡주사에 모여 추억을 되새기는 행사를 가졌다. 하지만 세월 앞에 장사 없듯이 올 봄 곡주사도 변화의 소용돌이를 피해가지 못해 주인이 바뀌었다. 일흔 고개를 훌쩍 넘긴 곡주사 주인이 가게를 꾸려 나갈 형편이 되지 않아 처분했기 때문이다.
향교 근처에 있는 '남산동 도로묵'도 사정은 비슷하다. 오랫동안 '도로메기 왕대포'라는 이름으로 장사를 해오다 대폿집 문패를 변경했다. 특히 안타까운 일은 1961년 문을 연 뒤 쉬지 않고 대폿집을 지켜온 주인 할머니가 지난해 세상을 떠난 것이다. 지금은 며느리가 운영하고 있다.
술 시키면 거저 주었으나 값이 오르면서 1970년대 100원을 받고 도로묵을 판매한 것이 이집의 간판 안주가 됐다. 몇년 전 화가 사석원은 '대폿집의 원형 같은 곳이다. 원형은 군더더기 없고 단출한 것이다. 흔한 액자 하나 없지만 숫자만이 덩그렇게 적힌 달력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다. 그런 결핍이 우아하다. 그 결핍 뒤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꿈과 휴식이 포개져 있다. 만가지 사념들은 사라지고 대포 한잔으로 고단한 삶의 늪 속에서 발 한짝을 빼 볼 수 있다'고 소개한 곳이지만 영욕의 세월의 빗겨가지 못했다.
'곡주사'와 '남산동 도로묵'의 변천사를 보면 소박하고 정겨운 서민들의 따뜻한 정과 활기찬 삶의 흔적도 함께 사라지고 있는 것 같아 씁씁한 감정을 감추기 힘들다.
최근에는 복고풍을 타고 퓨전식 대폿집이 많이 생겼다. 신세대 감각에 맞춘 까닭에 옛날 분위기는 없다. 일부러 찌그러 뜨린 양은 주전자와 잔에서는 세월의 흔적 대신 추억을 모방하려는 어설픔만 엿보인다. 대폿집의 낭만을 기억하는 중년들이 추억의 한 자락을 잡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이경달기자 sarang@msnet.co.kr
사진 정재호기자 new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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