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분야 '프로'가 되라…대경대 부총장 강삼재

입력 2008-11-15 06:00:00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그는 기자에게 이렇게 주문했다. "재미없는 정치 이야기는 조금만 쓰세요. 다 지나간 일인데 뭐." 하지만 대경대학 강삼재 부총장(조만간 관련 법 개정을 통해 전문대 학장이라는 명칭이 총장으로 바뀔 것이라고 그는 밝혔다)과 약 160분간 나눈 대화 중 140분은 정치 이야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천하의 강삼재' 아니던가.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그마한 대학에 총장도 아니고 부(副)자가 붙은 자리'에 앉아있지만 한때 그는 한국 정치사를 쥐락펴락하던 인물이었다. 정치와 결별을 한 뒤 교육계로 뛰어들었다지만 여전히 그에게는 여당 사무총장 강삼재라는 타이틀이 귀에 익다.

명함을 교환하고 자리에 앉자마자 그는 거침없이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때로는 스스로 격정에 못 이겨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 정도로 흥분하기도 했고, 때로는 얼음처럼 차갑고 냉철하게 한마디 쏘아붙이기도 했다. 그가 소망했던 대로 방송국 PD가 됐더라면 드라마이건 다큐멘터리이건 재미있는 이야기를 담아낼 소질이 충분해 보였다. 그가 가장 많이 쓴 단어는 '5선 국회의원'과 '프로'였다. 자신감이 넘쳤지만 그릇의 크기를 아는 인물이었고, 감정이 격앙되는 듯 싶다가도 어느새 차분한 모습으로 어조를 낮출 줄 아는 노련함을 지닌 인물이었다. 18가지 질문을 준비해 갔지만 절반밖에 못 물어봤다. 나머지는 물을 필요가 없었다. 미리 질문지를 본 것처럼 다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그의 이야기는 수십년 세월을 넘나들었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가급적 시간 순서대로 나열해 본다.

◆32세에 금배지를 달게 된 강삼재

경남 마산 출신인 그는 경희대 신문방송학과(71학번)에 입학했고 총학생회장이 됐다. "총학 선거 당시 제가 4천700여표, 나머지 두 후보가 600여표, 200여표를 얻을 만큼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학생운동을 하다가 감방 신세를 지면서 결국 제적당했죠." 대학 졸업장도 없는 운동권 출신이 취업할 곳은 전혀 없었다. 위장 취업도 안 됐고, 급기야 다방에서 '강군'으로 불리며 다방 아가씨들 뒷바라지하는 일까지 해야했다. 어느 날 그는 경남신문사에서 기자를 뽑는다는 공고를 보고 신문사를 찾아갔다. "운 좋게 시험성적이 좋았나 봐요. 하지만 면접에서는 대학 졸업도 못했고 운동권 출신인 게 드러날 게 뻔하잖아요. 내가 먼저 까놓고 얘기했죠. 그 신문사 실질적 오너가 청와대 경호실장 출신이었어요. 예상 외로 합격시켜주더군요." 기자 생활을 하던 강삼재는 1981년 11대 총선을 맞아 출마를 결심했다. 나이 28세였다. 보름이라는 짧은 선거운동 기간에도 불구하고, 3천표라는 간발의 차이로 고배를 마셨다. "당선되려고 했던 건 아니었습니다. 유세장에서 하고픈 말이나 실컷 하다가 경찰서에 붙잡혀 갈 각오였습니다.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선거운동을 했는데, 지지하는 시민들이 두루마기 주머니에 돈을 찔러주었습니다. 유세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두루마기를 벗으면 주머니에서 떨어진 돈만 수백만원이 넘었습니다." 뒤늦게 대학에 복학한 그는 공부를 계속할 생각으로 대학원에 진학했다.

하지만 정치권은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당시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이던 김상현씨가 12대 총선 출마를 권유했다. "김상현씨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리지만 적어도 저는 그분을 정말 고맙게 생각합니다." DJ라인이던 김상현 의장의 도움으로 나이 32세에 금배지를 달았지만 결국 그는 YS 사람이 된다. "신의를 저버렸다고 하는데 그건 아닙니다. 당시 지역구 마산의 민심도 그랬습니다. 계파가 달랐을 뿐 야당이었으니까 별 문제 없다고 여겼죠."

◆39세에 3선 국회의원, 43세에 여당 사무총장

32세에 국회에 입성했지만 그는 국회의원이 아니었다. "당시 국회의원 평균 연령이 60세쯤 됐습니다. 아들뻘 되는 초선의원이 왔으니 그저 귀여워할 뿐 제대로 의원 대접받았겠습니까?" 갑작스레(?) 여의도로 온 강삼재는 단칸방에서 하숙을 하고 살았다. "어느 날 퇴근하는데 하숙집 주인 아주머니가 놀란 표정으로 집 앞에 나와있는 겁니다. 아주머니를 따라 집에 가보니 거실 의자에 부총리가 앉아있는 겁니다. 당연히 그 집이 제 집인 줄 알았고, 주인 아주머니가 제 아내인 줄 알았던 겁니다. 2평도 채 안 되는 제 방에 부총리를 모셨더니 적잖이 놀란 표정이더군요. 그때 이후로 그 부총리는 저를 다르게 보더군요."

그에게는 올해 88세 된 모친이 있다. 23년 전 12대 총선에서 막내 아들이 처음 금배지를 달던 날, 만면에 웃음을 띤 채 집으로 들어선 아들에게 어머니는 한마디 던지고는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사내가 한번 이겼다고 웃기는." 2선에 성공했을 때에도 어머니는 기뻐하지 않으셨다. 나이 39세에 3선 의원이 되자 그제서야 어머니는 집에 온 아들을 꼬옥 껴안으며 "그래, 고생했다"고 어깨를 다독였다. "서울에서 대구로 내려온 뒤 한 가지 좋아진 게 있습니다. 가끔이나마 퇴근길에 바로 마산에 있는 어머니를 찾아가 얼굴 뵐 수 있다는 거죠. 서울에서는 엄두도 못 냈는데." 못 찾아가는 날은 하루에 한 번 안부 전화를 한다.

내리 4선을 하면서 그는 민주당 대변인 및 사무총장, 신한국당 사무총장 등을 역임했다. 1995년, 당시만 해도 사무총장은 당 총재인 대통령을 대신해 정당 살림살이와 인사권 등 모든 것을 휘둘렀다. 그 자리를 43세의 강삼재가 올랐다. 하루에 서너 번씩 대통령을 만날 때도 있었다. 하루에 직접이든 간접이든 가장 돈을 많이 써본 게 얼마인지 물었다. "선거 때 하루 300억~400억원도 써봤어요. 당 소유 건물을 팔고난 대금 500억원(수표)을 하루 종일 가슴에 품고 다닌 적도 있습니다."

◆안풍(安風) 사건과 인간 강삼재

인터뷰 자리에 앉자마자 말문을 열기 시작한 그는 내리 56분간 현대 정치사의 장면 장면을 술회했다. 중간에 기자가 "제발 질문 좀 하게 해달라"며 끊지 않았다면 2, 3시간도 문제 없었을 것이다. 그의 말 속에는 이른바 '안풍 사건'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담겨있었다. 1996년 15대 총선 당시 안기부(현 국정원) 계좌에서 나온 자금 1천190억원이 신한국당(현 한나라당)에 지원됐다는 것이 바로 안풍 사건이다. 당시 사무총장이던 강삼재는 2001년 검찰에 의해 기소됐고, 1심에서 징역 4년에 추징금 731억원을 선고받았다. 2심 판결이 있기 전 폭탄선언이 터져나온다. 안기부 자금이 아니라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서 받은 돈이라는 기사가 나왔고, 이후 2심과 3심에서 그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와 관련해 그는 많은 말을 했지만 민감한 부분은 말을 아꼈다. 비록 그가 처음 폭로한 것도 아니었지만 '신의를 저버린 사람'이라며 손가락질하기도 했다. 초선의원이었던 그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돈 조심해라. 함부로 돈을 받지 마라. 아쉬우면 내게 와서 받아라." 둥글디 둥근 세상 일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2심 판결 전, 마산에 내려가 있을 때 그는 자살바위에 올라가 네 차례나 죽음을 생각했다. "그간 쌓아왔던 것이 모두 무너졌습니다. 공판 때마다 판사가 솔직히 털어놓으라고 말했지만 3년 가까이 입을 닫고 있었습니다. 그게 주군을 모시는 사람의 도리였습니다. 제 뜻이건 아니건 김영삼 전 대통령의 이름이 거론됐을 때 너무나 힘들어 죽음을 생각했습니다." 기자는 지금도 YS의 자금이 어떻게 조성됐는지 모르느냐고 물었다. "모릅니다. 당시 수표로 받았습니다. 윗사람이 필요할 때 쓰라고 돈을 건넬 때 누구에게 받았는지 일일이 캐묻지 않는 게 도리입니다."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부총장 강삼재

뜬금 없는 물음일 수도 있지만 훗날 어떻게 기억되고 싶은지 물었다. "국회의원으로, 사무총장으로 많은 일을 했지만 지금 머리 속은 하얗습니다. 아무런 기억도 없고 기억 속에 남겨두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저 흘러 지나간 일일 뿐이죠. 당시 나라와 정당을 위해서 최선의 선택을 했다고 생각하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가 이런 일을 했소'라고 자랑할 만한 게 하나도 없네요. 그저 매 순간 최고의 선택을 했고 그게 옳다고 믿었습니다."

인터뷰 중 그가 가장 흥분하며 열정을 토로한 대목은 처음 국회의원이 됐을 때 이야기였다. 재선, 3선에서 사무총장까지 오르면서 그리고 마지막 순간 한나라당으로부터 '배신' 당하고, 급기야 지난 대선에 자유선진당 이회창 후보를 도울 때까지 벌어진 주요 사건들을 술회하면서 그의 목소리는 오히려 잦아들었다. 분위기가 가라앉는 것 같아서 엉뚱한 질문을 했다. 출처도 묻지않는 10억 원이 생긴다면 어디에 쓰겠느냐고. "안 받습니다. 땀 흘리지 않고 생긴 돈은 분명 화를 부릅니다. 행여 그 돈을 전액 기부한다고 해도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지는 못합니다. 누군가 훔쳐온 돈일 수도 있고, 누군가 피눈물을 흘릴 돈일 수도 있습니다." 주량을 묻자 "소주 한 병"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의 주량은 사실 가늠하기 힘들다. 반주 한잔은 싫어하지만 허리띠 풀고 제대로 먹자고 덤비면 먼저 자리를 뜬 적이 없다고 했다.

◆교육계 '프로'로 변신한 강삼재

정치권에 돌아갈 의사가 없는지 묻자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서울에서 석좌교수 자리나 차지해서 이름만 걸어놓고 월급 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구까지 찾아왔을 때에는 제 나름의 결심이 있었던 겁니다. 물론 정치권과의 결별에 대해 '절대로'라거나 '영원히'라는 단어는 쓰지 않겠습니다. 저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건 인정합니다. 다만 제가 이 자리에 있는 동안은 제가 아는 지식과 인맥을 총동원해서라도 대학 발전 나아가 지역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겁니다. 저는 '프로'입니다. 자리 하나 차지하고 앉아서 그저 '내가 강삼재인데'하며 목에 힘주고 있지는 않을 겁니다. 이제 대학 교육계에 뛰어들었으니 교육에서 프로가 될 생각입니다." 그는 유진선 대경대학 총장과의 인연과 철학이 통해서 이곳에 오게 됐다고 설명했다. 총장도 아니고 전문대학 부총장, 그것도 자신보다 나이가 적은 총장을 모신다는 말에 주위에서 만류하기도 했다. "한때 내로라하던 저였지만 부총장에게 주어지는 월급 외에 한 푼도 더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대구에서 살 관사 하나 마련해 달라고 했을 뿐입니다." 현재 대구 수성구 시지에서 관사로 쓰는 전세 아파트에 그 혼자 살고 있다. 아내도 함께 몇 달간 지냈지만 지금은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는 딸 뒷바라지 하느라 서울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다. "나이가 드니까 남편보다는 자식들이 더 귀한가 봐요. 하하하. 우리 대학 학생들도 저에게는 자식과 같습니다. 전문대학에 다닌다는 패배의식을 떨쳐버리게 만들겁니다. 우리 학생들을 명문대 출신 학생들처럼 만들겠다는 게 아닙니다. 적어도 자기 분야에서는 최고로 만들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 제가 가진 역량을 총동원하겠다는 겁니다. 제가 이곳에서 잘해낸다면, 한때 정관계에서 큰 일을 했던 어른들이 서울이 아닌 고향에 내려와 보탬을 줄 수 있는 계기를 만들 수 있을 겁니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사진·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 강삼재는?=1952년 7월 경남 함안 출생으로 마산에서 중·고교를 마친 뒤 경희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했다. 28세에 11대 총선에 도전했다가 고배를 마신 뒤 12대 총선에서 32세로 국회에 입성했다. 5선 국회의원인 그는 43세이던 1995년 당시 여당이던 신한국당 사무총장을 맡게 됐다. 정권이 바뀐 뒤 2001년 세칭 '안풍 사건'으로 기소됐고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뒤 2003년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이후 2, 3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올해 2~4월 자유선진당 최고위원을 지냈고, 지난 6월부터 대경대학 부총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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