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영공원 있던 실제 측우대, 서울 기상청에 가 있다니…

입력 2008-11-06 06:00:00

[대구 도심 재창조] ④도심속 역사가 사라진다

대구의 역사·문화자산은 어떤 모습인가.

세계적 관심을 받고 있는 도시들은 두가지 차원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다. 하나는 사람들이 살기 좋은 환경을 갖추었느냐, 또 하나는 도시 고유의 매력과 특성을 살리고 있느냐이다. 전자가 주거와 환경, 보행과 교통, 공원과 녹지 등 쾌적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필요조건이라면, 후자는 도시의 정체성을 좌우하는 역사와 문화를 보존하고 발전시켜 '살고 싶은 곳'으로 만드는 충분조건인 것이다.

세계 도시들 사이의 경쟁이 갈수록 뜨거워지는 최근 들어서는 역사·문화자산에 대한 관심과 투자가 한층 중요한 일로 떠오르고 있다.

◆도심은 역사·문화유산의 보고

대구 도심을 걷다 보면 의외로 역사 자산이 많음을 발견하게 된다. 달성토성, 경상감영공원의 여러 건축물, 대구읍성 관련 유적들은 영남지역의 중추로 발전해온 대구의 역사를 그대로 보여준다. 조선식산은행(옛 산업은행 대구지점)과 계산성당, 선교사 박물관과 화교회관 등 건축물이 대변하는 근대사도 또렷이 들린다. 중구에 대구 근대문화유산 134개 중 47.7%인 64개, 지정문화재 18개 가운데 17개가 몰려 있다는 기초적인 통계만 봐도 도심의 역사를 가늠할 수 있다.

더욱 놀라운 자산은 골목과 집들이다. 약령시와 진골목, 화교거리와 뽕나무골목 등 대구 도심의 길고 짧은 무수한 골목들이 사람들의 발(足)에 의해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 골목이 생긴 후로 단 한 번의 변형도 없이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경이롭다.

김천과학대 건축인테리어과 김주야 교수는 "1907년에 대구 읍성을 철거하고 일주도로와 십자로를 건설하는 공사가 벌어졌지만 읍성 터를 활용하고 기존 골목들을 연결하는 수준이었다"며 "여러 차례의 도시계획 과정에서도 골목길이 원형을 잃지 않은 대구 도심은 전국적으로도 드문 소중한 사례"라고 말했다.

골목들 사이로 점점이 뿌려진 한옥들과 근대 건물들도 버리기 힘든 유산이다. 도시개발의 바람에 떠밀려 많은 건축물들이 사라졌지만 사람살이의 터를 수십년째 지키고 있는 건물이 의외로 많다. 특히 1910, 1920년대에 조선 사람들의 집단 주거지가 형성된 동산동과 계산동, 대안동 등에는 한옥과 근대 건축물들이 지금도 군데군데 모여 당시의 삶을 말해준다.

◆보존과 활용 위한 큰 그림 그려야

어느 도시든 정체성을 좌우하는 역사·문화유산을 가장 많이 담고 있는 곳은 도심이다. 세계 도시들은 도심의 유산을 활용해 도시를 알리고, 축제와 이벤트를 열고, 관광객을 끌어들인다. 이는 곧 도심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혜택과 수익으로 돌아가면서 도심의 활기가 도시 전체로 번져나가는 선순환 구조를 갖게 된다.

대구는 어떠한가. 도심에 충분히 매력적인 자산들을 보유하고 있지만 활용하는 데는 도무지 관심이 없다. 문화재로 지정될 정도의 덩치 큰 건물들에만 눈길을 준다. 감탄할 만한 유산에만 열을 올린다. 이들 몇몇을 억지로 연결시킨 도심 관광 코스의 스토리는 엉성할 수밖에 없다. 이런 도심이 주는 역사·문화적 매력이 풍성할 리 있을까.

속을 들여다보면 더 딱하다. 특정 건물이나 유적, 개별 건축물 등에 대한 보고나 조사 자료는 있지만 대구 도심의 역사·문화유산을 한눈에 보여주는 자료는 어디에도 없다. 한옥과 근대 건축물들이 도심에 어떤 유형으로 어떻게 분포돼 있고, 개·보수와 신축 가운데 어느 쪽이 적합한지, 어떤 방식으로 활용하면 좋을지 등에 대한 연구야 말할 것도 없다.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과 바람을 누구도 알려 하지 않는다. 주민들이 역사를 버리고 개발을 택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서울 도심의 역사 보전은 눈여겨볼 만하다. 특히 대표적 한옥마을인 북촌 가꾸기는 대구에 많은 점을 시사한다. 서울 600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북촌에도 1990년대 개발 바람이 일었다. 건축기준이 완화되면서 한옥 철거가 이어졌다. 다세대주택으로 난개발이 계속되던 이곳에 변화가 시작된 것은 2000년. 서울시와 일부 주민, 뜻있는 시민들이 나서 한옥등록제를 도입해 소유주에게 각종 혜택을 주고, 서울시가 일부 한옥을 매입해 문화공간이나 게스트하우스 등으로 활용하는 등 환경정비계획을 수립한 것이다.

물론 초기에는 개발을 원하는 상당수 주민들이 거세게 반발했다. 그러나 한옥등록제를 통해 개·보수 비용을 실제로 지원하고 서울시가 한옥을 매입해 주민을 위해 활용하고 관광객 발길이 쏟아지면서 신뢰가 살아났다. 그 결과 철거되는 한옥 숫자가 1985~2000년 사이에 571동에 이르던 것이 2001년 10동, 2002년 2동으로 크게 줄었다. 북촌 골목길에서 만난 한 주민은 "10년 사이에 집값이 몇배나 올랐다"며 "다세대주택으로 개발한 사람들보다 한옥을 유지한 사람들이 더 이득을 본 셈"이라고 말했다.

서울시에서 북촌 가꾸기 사업을 기획·추진했던 경원대 도시계획학과 정석 교수는 "이제는 한옥의 보전과 개보수 위주의 응급조치를 넘어 북촌의 역사·문화적 가치를 재정립하고 서울의 옛 모습을 어떻게 지키고 가꾸어 나갈 것인지에 대해 큰 틀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서울을 세계 일류도시로 키우는 출발점은 개발지상주의가 아니라 수려한 자연과 풍부한 역사·문화유산"이라고 말했다.

대구는 과연 역사 유산을 제대로 보전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얼굴이 화끈거리는 사례는 도심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1907년 읍성 철거와 함께 소실된 4성문과 동·서소문, 4누각 가운데 제대로 복원된 것은 하나도 없다. 4성문 가운데 남문이었던 영남제일관은 1980년 수성구 만촌동 망우공원에 세워졌지만 원형 복원에는 실패했다. 동성로 SC제일은행 대구지점 앞, 서성로 조흥은행 앞, 남성로 약전골목과 종로가 만나는 곳, 북성로 옛 조일탕 앞 등 옛터에 만들어둔 손바닥만한 자리석은 후손들에게 민망함만 던져줄 뿐 역사에 대한 자부심은 한올도 안겨주지 못한다. 읍성의 네귀퉁이에 있던 4누각 가운데 북서쪽의 망경루는 유일하게 원형대로 달성공원 안으로 옮겨졌지만 1969년 복원을 전제로 설계도를 만들고 해체한 이후 지금껏 제 모습을 찾지 못하고 있다.

대구시가 경상감영공원 내 선화당과 징청각을 복원해 역사테마공원으로 조성한다는 계획은 반갑지만 선화당 앞 측우대는 언제 진짜가 되돌아올지 기약도 없다. 지금의 측우대는 원형과 같이 만든 표시석일 뿐 1770년(영조 46년)에 만들어진 진짜 선화당 측우대는 어찌 된 일인지 서울의 기상청 전시장에 보물 제842호라는 이름으로 전시돼 있다. 해외로 나간 문화재까지 되찾자는 마당에 서울 있는 대구 문화재를 되찾아오지 못하는 연유는 무엇일까.

지난달 중순 방문한 일본 가나자와시(市). 시민들이 함께하는 문화예술공간으로 잘 알려진 '21세기 미술관' 내 상점에서 우연히 '가나자와 도시주택 신진대사'라는 인쇄물을 집었다. 빳빳한 전지 앞뒤에 작은 활자의 일본어와 영어, 그림과 사진이 빼곡한 인쇄물은 미술관 기획팀이 지난해 4월부터 6개월 동안 가나자와 도심의 주택들을 실사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방문객이 도심에서 걸어가면 쉽게 찾을 수 있는 6개 거리의 주택들을 소개했는데 한마디로 대단했다. 17세기 에도(江戶)시대 원형을 간직한 형태에서부터 기본적인 특징만 반영한 최근 형태까지 4개 세대, 10개 유형으로 나눠 거리의 집 수천채를 하나하나 구분해 표시했다. 각 유형에 대한 설명과 대표적인 주택 사진들, 위치까지도 상세히 싣고 있었다. 어디로 가면 17세기 또는 18세기 형태의 주택이 많은지, 어디에 21세기에 맞게 개조한 주택이 많은지 한눈에 판단할 수 있었다. "조금만 걸으면 가나자와의 다양한 주택과 거리 경관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습니다"라는 권유가 실감났다.

경관 보전과 주거환경 개선을 통한 도심 재생 사업으로 유명한 교토시(市) 마치즈쿠리센터는 지난달 19일부터 1년 계획으로 도심 주택조사를 시작했다. 10년 전에 대대적으로 벌였던 조사를 보완하기 위한 것. 당시 시민자원봉사자 600명과 시민단체, 대학 등이 나서 건물들의 외형을 하나하나 조사하고 거주자들에 대한 설문조사까지 벌인 결과 2만8천개가 보존 대상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보존과 홍보는커녕 현장 조사조차 엄두를 못 내고 있는 대구와 비교하면 일본 두 도시의 사례는 감탄스러웠다. 발상을 바꾸면 대구에서도 얼마든지 해낼 수 있다는 희망도 보였다. 마치즈쿠리센터 데라모토 겐조 사무국차장은 "센터 출범 이듬해 조사사업을 벌였는데 시민들의 참여 열기가 대단히 높아 예상보다 수월했다"며 "조사 과정에서 옛 주택의 가치와 보존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추후 사업에 많은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동참하게 만드는 효과까지 거뒀다"고 말했다. 대구에도 이 같은 열정을 가진 시민들은 분명 많을 것이다.

특별취재팀 김재경기자 서상현기자 사진·이채근기자

♠ 선화당 앞 측우대 1770년 제작 보물, 되찾지 못하나

경상감영공원 선화당 앞 측우대를 아십니까. 선화당측우대는 영조 46년(1770년)에 만들어져 전국 각지로 보내진 7기의 측우대 가운데 하나로 유일하게 남은 것이다. 측우대는 빗물을 받아 강우량을 측정하는 측우기를 올려놓고 측정하던 대(臺)로 측우기의 존재를 확인해주는 귀중한 유물이다. 선화당측우대는 현존 측우대 가운데서도 유일하게 제작연대가 확실해 보물로 지정된 3개의 측우대 가운데 맨앞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경상감영공원의 측우대는 가짜다. 진짜는 서울 기상청에 있다. 언제 왜 그리로 옮겨졌는지 아는 사람도 찾기 어렵다. 선화당측우대의 존재 자체를 모르니 원래 자리로 되찾아오려는 움직임도 지금껏 없었다. 3개의 보물 가운데 관상감측우대는 기상청에, 창덕궁측우대는 고궁박물관에 있다. 선화당측우대만 제자리가 아니다. 해외로 나간 문화재까지 되찾자는 마당에 서울 있는 대구 문화재를 되찾아오지 못하는 연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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