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파란 섬의 아이

입력 2008-11-05 06:00:00

이네스 카냐티 지음/최정수 옮김/문학동네 펴냄

▲영화
▲영화 '테스'의 한 장면

프랑스의 시골 마을. 여우가 사는 하얀 모래언덕 외딴집. 엄마 제니와 사생아인 딸 마리가 살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제니를 '미치광이 제니'라고 불렀다. 그리고 엄마 꽁무니만 따라다니는 딸 마리에 대해 '제 엄마와 똑같다'고 말했다. 모녀가 사는 외딴집을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라고 단정지었다.

◈ 엄마 제니

남의 집 일을 거들며 사는 엄마 제니는 종일 일했다. 다른 사람들이 쉬는 동안에도 그녀는 일했다. 닭장과 토끼장을 치우고 외양간을 치웠다. 돼지를 잡는 날 사람들이 꺼리는 피를 받는 일, 전염병에 걸린 토끼를 죽이는 일도 그녀의 몫이었다. 뜬눈으로 밤을 새우며 암소의 새끼를 받았고 남의 집 식사준비도 거들었다. 그녀는 장화 속에 짚을 깔고 축축한 땅을 걸어다녔다.

사람들은 쉬거나 낮잠을 잘 시간에 이렇게 말했다. '미치광이 제니, 지금 할 일이 없으면….' '미치광이 제니, 잠깐 쉬는 동안에….' '미치광이 제니, 이것만 하고 쉬어요.' 그래서 제니는 새벽부터 깊은 밤까지 쉴 틈이 없었다. 그렇게 일하고 받은 품삯은 과일 몇개, 먹다 남은 음식, 바구미가 갉아먹은 완두콩, 돼지에게 줄 순무잎 한 아름이었다.

사람들은 제니를 불러서 일 시키기를 좋아했다. 일을 잘했고, 돈을 받지 않았으며, 쉬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앙투안이 그녀와 결혼하려 하자 사람들은 반대했다. 제니를 정신병원에 가두려고 했고, 앙투안이 나쁜 남자라고, 결혼해서는 안 된다고 제니를 협박했다. 값싸고 좋은 일꾼을 잃기 싫어서였다.

◈ 딸 마리

마리는 엄마 뒤를 졸졸 따라 다녔다. 안개가 낀 날 밭에서 일하는 엄마가 안개 속으로 사라져 돌아오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밤길을 걸어 이웃마을로 일하러 갈 때는 엄마를 놓치지 않으려고 짧은 다리로 종종걸음 쳤다. 마리가 너무 처지면 엄마는 잠시 서서 기다렸다. 그러다가 마리가 가까이 다가오면 돌아보지 않고 종종걸음을 쳤다. 남의 집에서 일할 때도 늘 엄마를 볼 수 있는 곳에서 놀았다. 집에서 홀로 엄마를 기다릴 때는 엄마가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몸을 떨었다.

마리는 엄마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엄마가 있어서 정말 행복해요.' '엄마와 이렇게 영원히 살고 싶어요.' '엄마가 돌아와서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그러나 마리는 그런 말을 입밖에 내지 못했다.

엄마는 말했다. '엄마 뒤만 졸졸 따라 다니지 마라.' '일을 방해하지 마라.' '집에 가거라.' '이제 자거라.' 엄마는 종종 '나는 가진 게 하나도 없어'라며 눈물짓거나 한숨지었다. 마리는 '엄마, 제가 있잖아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말할 수 없었다. 피로에 전 엄마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잠들었다.

◈ 엄마와 딸

마리가 혼자 집에 있던 날 마을의 석공 에르네스트가 찾아왔다. 그는 문을 잠그고 어린 마리를 몰아세우며 말했다.

'너는 아름다운 갈보야. 네 엄마처럼 말이야.'

그 뒤로도 엄마가 없는 날이면 석공 에르네스트는 집으로 찾아왔다. 마리는 공포와 열병을 앓았다.

엄마 제니는 마리가 공부를 계속한다는 조건으로 앙투안과 결혼했다. 엄마가 앙투안과 결혼하기 직전 마리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말해달라고 졸랐다. 열일곱 살이던 엄마를 강간해, 자신을 태어나게 한 사람은 석공 에르네스트였다. 마을에서 가장 좋은 집안의 딸이던 엄마는 강간당하고 임신했다는 이유로 집에서 쫓겨났다. 그리고 다시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녀가 여우들이 사는 외딴집에서, 남의 일을 거들며 가난하게 사는 이유였다. 무능한 할아버지는 공상소설에 빠져있었고, 할머니와 엄마의 사촌들은 엄마를 천대했다. 그들은 손녀인 마리 역시 천대했다.

◈ 새아버지와 남동생

앙투안과 결혼한 엄마 제니는 예쁜 아들을 낳았다. 남편과 잘생긴 아들을 가진 엄마의 눈은 이제 더 이상 흐릿하지 않았다. 엄마는 더 이상 남의 집 일을 하지 않았다. 외양간을 치우지도, 소젖을 짜지도 않았다. 엄마는 아기를 돌봤다. 아이가 아장아장 걷기 시작했을 때 마리는 동생을 데리고 할아버지 집으로 갔다. 할아버지 임종이 임박했기 때문이다. 새아버지 앙투안은 '아들을 데리고 가서 얼마나 잘생겼는지 보여주라'고 했다. 그날 짓궂은 마리의 사촌형제들이 아기에게 술을 먹였다. 술에 취한 아기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병원으로 달려가 의사를 불렀지만 의사는 와 주지 않았다. 그는 이전에 엄마 제니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한 사람이었다. 그는 통쾌하게 복수를 감행한 셈이다. 이튿날 아이는 죽고, 엄마 제니는 예쁜 옷으로 갈아입고 자살했다. 제니에게 삶은 곧 불행이었다. 그녀는 죽어서야 불행의 천형에서 벗어났다.

◈ 행복이 감춘 비수

이 소설은 제니의 불행한 일생이자, 딸 마리의 외로운 성장기다. 두 여자의 삶을 통해 소설은 '불행에는 액땜이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간다'고 말한다.

강간당한 여자, 말을 잃은 엄마와 딸, 상처 입은 영혼을 미치광이로 간주하는 동네사람들, 강간당한 딸을 쫓아낸 어머니, 자신이 강간한 여자의 딸을 또 강간하는 석공, 죽도록 일을 시키고도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동네사람들, 대가는커녕 제니의 새출발(혼인)마저 막는 사람들, 아이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오지 않는 의사…. 이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폭력성을 대변한다.

물론 행복한 상황, 친절한 사람도 있었다. 죽도록 일한 대가로 받은 암소, 제니와 결혼한 앙투안, 잘생긴 남동생, 기차역에서 만난 마리의 남자 친구 피에르…. 피에르는 마리에게 "내가 너를 내가 태어난 감미로운 파란 섬으로 데려갈게" 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희망과 행복은 불행을 삼키게 하는 미끼에 불과하다. 삶은 끝없는 불행의 연속일 뿐이다. 죽도록 일한 대가로 받은 암소는 우물에 빠져 죽었다. 앙투안과 결혼해서 낳은 제니의 아들(마리의 동생)은 짓궂은 사촌들이 먹인 술을 먹고 죽었다. 기차역에서 만난 마리의 남자친구 피에르는 비행기 사고로 죽었다.

행복은 미소지으며 다가와 날카로운 이빨을 목덜미 깊숙이 박았을 뿐이다. 그럼에도 마리는 살아간다. 어쩌면 살아서 불행한 것이 인간의 존재이유라는 듯이 말이다. 이 작품은 프랑스의 유서 깊은 문학상인 '되마고' 상을 수상했다. 간결하고 감정이 절제된 문체가 오히려 사람을 아프게 한다. 247쪽, 1만원.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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