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정치의 타성, 생활의 타성

입력 2008-11-04 06:00:00

모든 걸 과거 정권 탓하는 위정자/그 꼴 보며 술.담배 못끊는 나는?

담배나 술을 끊어야 한다는 생각을 40여 년 동안 하면서도 끊지 못하고 있다. 그런 걸 무슨 자랑이라고 떠드느냐고 타박할 분이 계실지 모르지만, 잘난 분들의 거창한 설교나 해설밖에 없는 판에 이런 못난 사람의 돼먹지 못한 글도 있어야 사람 사는 맛이 날지도 모른다. 이런 얘기를 하는 나는 타고난 건강을 자랑하여 술 담배를 끊지 않는 위인이 아니다. 오랫동안 간염 등을 앓아 의사나 가족으로부터 끝없이 금연 금주의 강요를 당해도 못한다. 매일처럼 목이 아파 각종 약을 먹는데도 기침을 하며 담배를 끝없이 피운다. 술이 약해 몇 잔 만에 금방 취하고 인사불성으로 기억상실을 거듭하면서도 술을 끊지 못한다. 아마 그동안 수백 번 반성문이나 각서를 쓰기도 하고 맹세도 수천 번 했지만 안 된다. 담배나 술을 끊는 약도 먹어 보고, 끊게 하는 효과가 있다는 각종 특수 운동도 해보았지만 안 된다. 천성적인 의지박약이라고 자책도 하고 인격개선 불능이라고 자학까지 했지만 안 된다.

게다가 더 고약한 것은 술과 담배를 끊는다고 맹세한 뒤 하루도 지나지 않아 다시 마시고 피우면서 변명하는 버릇까지 생겼다는 점이다. 세상이 나에게 담배를 피우게 하고 술을 마시게 한다고 말이다. 그 세상 중에서 최근 단골은 단연 경제문제다. 입버릇처럼 모두 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특히 요즘은 물가나 환율이나 주식 변동 때문에 하루하루 일희일비하며 술과 담배를 끊다가 마시고 다시 피우는 등 야단법석이다. 주식 투기나 달러 장사를 할 위인도 못 되면서 말이다. 그러니 경제문제는 사실 내 진짜 고민이 아닐지 모른다. 물가나 환율이 올라 화난 게 아니라 정말 화가 난 이유는 대통령이나 장관들이 줄곧 아무 걱정이 없다고 하더니 별안간 며칠 전 IMF 때보다 더 심각하다고 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저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 것일까? 저렇게 하루 앞도 모르면서 나라정치를 하고 나라살림을 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그래서 담배를 하루 만에 다시 피워 물었던 것이다. 그들이 계속 경제가 걱정이 없다 했는데도 담배를 끊은 이유는 실제로는 반대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대통령이나 장관들을 애초부터 믿지 않았다. 한 번도 믿은 적이 없다. 그래도 그들이 그렇게 말을 뒤집어 하는 것을 보면 공연히 화가 나서 담배를 다시 피우고 술을 마신다. 차라리 그들을 보지 않고 살면 속이나 편할까? 정치 없는 세상이면 담배나 술도 없어질까?

이런 정치 때문에 40년 단 하루도 속이 편치 못했다. 직불금 문제만 해도 그렇다. 철밥통이라는 공무원이 동시에 사기밥통이라는 말을 들은 지도 옛날이지만 그게 '깨어지는 사기'가 아니라 '사기 치는 밥통'인 줄은 이제야 알았다. 그러나 더욱더 화가 난 것은 부재지주로 부당하게 직불금을 받은 공무원 등 모두를 당장 잡아들이지는 못해도 그 직불금이란 걸 지난 정권이 만들어 은폐했다는 이유로 그 정권 책임이라고 둘러대는 짓이다. 모든 게 지난 정권 탓이라고 몰아붙이는 게 우리 정치의 타성적 버릇이 됐으니 못난 아들을 둔 부모처럼 더 이상 어쩔 수 없어 할 말도 없는 심정이지만, 그래도 그렇지, 지난 국회에서 여야가 합의해 통과한 법률을 두고 이렇게 무책임한 변명의 정쟁만을 일삼을 수 있는가? 폐기된 명단이야 바로 복구해서 불법 징수자를 모두 밝히고 법대로 처리하면 되지 않는가? 담배나 술을 끊지 못하고 변명만 해대는 내 꼴이나 나라 꼴이나 어찌 이렇게 같으냐. 그러니 사실 나는 그런 나라 꼴에 잔소리할 자격도 없다.

어느 여류시인은 외국에 가면 해방감에서 담배를 피워 문다고 하지만 나는 반대다. 외제담배를 피워서는 안 된다는 애국심 탓이 아니라 외국에서는 걱정할 일이 없는 탓이다. 국내에서도 공공장소는 물론이고 남들 앞에서는 절대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그래서 내 방에서만 숨어 피우는 꼴이 됐다. 처음부터 남들이 멋있다고 해 피운 것이 아니라 혼자 속 썩이며 피운 것이다. 지금 나는 시장 점유율이 50%나 됐다는 미국산 쇠고기 소식을 듣고 어제 끊은 담배를 다시 피우면서 미국산 쇠고기를 구우며 한 잔 하러 가야겠다고 생각한다.

박홍규 영남대 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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