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산이 컴컴하다

입력 2008-10-31 09:10:55

이 가을에도 산이 컴컴하다? 요즘 산엘 가면 상·하의 일습(특히 바지 쪽이 심하다)으로 검은 등산복을 착용한 사람들이 온통 산길을 메운다. 사계절 구분이 없다. 나는 처음엔 무슨 산악회의 유니폼이겠거니 짐작했다.

3, 4년 전 어느 주말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날 대구 월드컵경기장 부근 산에서 한 무리의 등산객을 만났다. 대구의 모 고등학교 총동창회였다. 족히 200명은 될 것 같았다. 산 능선 길을 따라 장사진을 친 그들의 복장 또한 거의 전원 검었다. 한 사내를 붙들고 유니폼이냐고 물어봤다. 아니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윗도리가 각기 달랐다. 검은색 티셔츠, 점퍼, 남방 등 여러 가지였다. 무슨 사설경비·경호업체의 기동훈련이거나, 웬 낯선 신흥종교단체의 의식 같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등산복은 왜 꼭 검어야하는 걸까. 그것도 언젠가부터 갑자기……. 비록 '생활체육' 수준일지라도 등산은 등산이다. 굳이 말한다면 등산복은 그 실용성과 조난 등에 대비한 안전성만 고려한다면 무난할 것이다. 그런데, 등산복 색상이 무슨 상관일까. 또한 왜 하필 검은색이어야 할까. 색상만을 두고 생각해 본다면 등산복은 우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남의 눈에 잘 띄면 될 것이다. 또 무엇을 고려해야 할까……. 이 희미한 기준에도 사철 검은색은 영 맞지 않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이 '입맛' 까다로운 시대에 취향이나 개성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 무엇이 이렇듯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만인을 한꺼번에 '복장통일'시킬 수 있었는지.

나도 그럭저럭 한 30년 산엘 다닌 셈이다. 하지만 이처럼 '컴컴한 산색'은 생전 처음 본다. '뫼얼산우회'의 한 친구가 어느 날 이에 대한 그럴듯한 진단을 내놨다. 등산복 원단생산에서 완제품 판매에 이르기까지 모든 유통과정을 생각하면 각각의 해당 사업자들은 이 '검정 일색'이 엄청난 이득을 갖다 줄 수도 있다는 것. 만들기 쉽고, 따라서 생산원가도 절감되고, 팔기 쉽고, 그러니 색상별로 재고 날 리도 없고……. 하긴, 시중의 등산복 전문매장을 가보면 이러한 추정이 일부 실제로 확인되기도 한다. 온통 검다. 아예 선택의 여지를 없애버린 것 같다. 그렇다면 정말 장삿속의 개입? 그러나 이 말 또한 가당찮다. 그들 사업자가 이 산 저 산 등산객들을 전원 집합시켜 놓고 강제로 입히지 않은 다음에야 '등산복=흑색'이라는 현상이 가능하겠는가.

어떤 후배는 또 이렇게 말했다. "검은 색이 역시 품위가 있지요." 물론 그럴 수도 있다. 검정 정장이 엄숙한 장례식이나 결혼식, 또 무슨 기념식 등에 잘 어울리는 것쯤은 누구나 다 안다. 나도 경우에 따라 검은색을 선호하지만, 설마하니 사람들이 주말 산행을 나서면서까지 '품위'를 위해 너도 나도 시꺼멓게 차려 입을 것 같지는 않다.

아무튼, 좀 장난스럽게 말한다면 산을 너무 어둡게 하는 요즘의 검은 등산복 '부대'는 그야말로 단군 이래 초유의 '산사태'가 아닐까 싶다. 달리 해답이 없다. 이것은 아무래도 그저 건듯 지나가는 한때의 게릴라식 '유행'쯤으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유행'이 산을 타다니! 지나놓고 보면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것이 유행이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그것은 젊어 한때 명동이나 동성로에서 어울릴 수 있는 것이지, 대자연인 산길에선 그게 어째 좀, 그렇다. 부지불식간 '집단최면'에라도 걸린 걸까. 철따라 간간이 산행 장면을 비춰주는 TV화면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현재 전국적으로 '만연'된 이 검은 등산복 인구는 이래저래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교복이나 군복, 무슨 근무복처럼 어떤 집단의 목적을 위해서는 제복이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개개인의 취미활동, 건강증진에 나선 등산객들이 단체복을 입은 것 같은 모습은 어색하기만 하다. 이 늦가을, 만산홍엽의 저 단풍든 나무들처럼 울긋불긋한 자유복장이야말로 산이라는 자연에 가장 잘 어울릴 것이다.

문인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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